나프타 수입길 봉쇄 우려… 에틸렌 생산 급감에 강판 절단 연료 바닥
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 도크 꽉 찼는데 공정 중단 이중고
산업부, 나프타 '경제안보물' 지정 검토… 대체 수입선 확보에 총력
현대중공업·한화오션·삼성중공업, 도크 꽉 찼는데 공정 중단 이중고
산업부, 나프타 '경제안보물' 지정 검토… 대체 수입선 확보에 총력
이미지 확대보기해양 전문 매체 더 마리타임 이그제큐티브(The Maritime Executive)는 지난 18일(현지시간) 보도에서 "에너지 공급 차단 여파가 한국 조선 산업의 근간을 위협하고 있다"고 긴박하게 전했다.
이미지 확대보기에틸렌, 선박의 첫 단추를 쥔 연료
선박 건조는 거대한 강판을 정밀하게 절단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때 쓰이는 주력 절단 연료가 에틸렌이다. 에틸렌은 나프타(원유 정제 부산물)를 고온에서 분해하는 '나프타 분해' 공정을 통해 생산된다. 국내 에틸렌 공급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는 여천NCC(여천 나프타 분해 센터)는 최근 나프타 원료 수급 불능을 이유로 '불가항력(Force Majeure)'을 선언했다. LG화학,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등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도 잇따라 공급 지연 가능성을 공식 경고하고 나선 상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에틸렌이 전체 절단 연료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이를 대체할 공정 전환에는 시간과 비용이 든다"며 "에틸렌 재고가 소진되면 주요 조선소의 강판 절단 공정이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는다"고 밝혔다. 강판 절단 한 단계가 지연되면 선체 조립, 의장, 진수에 이르는 전 공정 일정이 뒤틀린다. '공정의 첫 단추'가 풀리는 셈이다.
호르무즈 봉쇄가 국내 화학·조선을 강타하는 경로
전 세계 원유 물동량의 약 20%가 통과하는 호르무즈 해협은 한국 원유 수입의 70%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는 국내 산업에 있어 사실상 '에너지 동맥'이나 다름없다. 이 해협이 분쟁으로 봉쇄되거나 보험료 급등으로 선박 운항이 사실상 차단될 경우, 충격은 정유·석유화학을 지나 조선업으로 곧장 전이된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달리, 이번 위기는 '수요 충격'이 아닌 '공급망 단절'이라는 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당시에는 주문 취소가 조선업을 덮쳤지만, 지금은 수주 잔량이 넘쳐나는데 원자재 공급 사슬이 끊기는 역설적 상황이다. 수요가 아무리 충분해도 원료가 없으면 배를 지을 수 없다.
'수주 호황'의 역설… 도크가 꽉 찬 조선소의 딜레마
현재 국내 조선 3사의 도크(선박 건조 작업장)는 대부분 2027~2028년까지 건조 일정이 예약된 상태다. 이는 단 수 주간의 공정 지연만으로도 전체 납기 일정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해운 업계 전문가들은 "납기를 맞추지 못하면 계약상 지체 보상금(LD, Liquidated Damages) 지급 의무가 발생하고, 반복될 경우 국제 발주사 신뢰를 잃는다"며 "지금 같은 수주 호황에 한 번의 납기 실패는 향후 수주 경쟁에서 중국에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중국 국영 조선사들이 낮은 가격과 빠른 납기를 무기로 추격해 오는 상황에서, K-조선의 최대 경쟁 우위는 '약속된 품질과 납기'다. 이 신뢰가 흔들리면 수주 호황은 순식간에 짐이 될 수 있다.
정부, 나프타 '경제안보물' 지정 검토… 대체 수입선 다변화 총력
산업통상자원부는 3월 13일 긴급 대책회의를 열고 국내 에틸렌·나프타 수급 현황을 즉각 점검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어 "나프타를 경제안보물로 임시 지정하고 대체 수입원 확보에 선제적으로 나서겠다"고 밝혔다.
정부 대응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국내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나프타가 프로필렌·고급 휘발유 생산에만 치중되지 않고 에틸렌 원료로 적절히 배분되도록 수급 관리를 강화하는 것이다. 둘째, 재외 공관과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를 총동원해 중동 외 지역의 나프타 수입선을 긴급 발굴하는 것이다. 미국·동남아·북아프리카 등이 대안 공급처로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통상부는 8일 기준으로 수급 불안 우려가 다소 누그러지는 흐름이 감지됐다고 밝혔으나,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이 근본적으로 해소될 때까지 비상대응 체제는 계속 유지할 방침이다.
"중동 의존도 낮추는 공급망 재편이 근본 처방"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가 단기 수급 조정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국내 한 에너지·자원 분야 교수는 "나프타 수입의 중동 편중을 지금 당장 바꾸기는 어렵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원료 다변화 투자를 중장기 전략으로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업계 관계자도 "에틸렌을 대신할 수 있는 혼합 절단 가스 기술을 조선사와 공동 개발하는 것도 중기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조선업계 내부에서도 "특정 원료에 의존하는 공정 구조 자체를 재점검해야 할 시점"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에틸렌 대란은 K-조선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도 공급망 하단의 작은 균열 하나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드러낸 사건이다.
수주 잔량을 쌓아 두고도 배를 짓지 못하는 나라. 호르무즈의 파고가 가져온 이 역설적 경고는 K-조선이 '기술 경쟁력'만큼이나 '공급망 복원력'을 국가 핵심 자산으로 키워야 할 때가 왔음을 말해 준다.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은 이미 한 몸이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