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고 역사 건물 삼킨 전자담배 불씨... 기존 소방 체계 속수무책
영국서만 연간 2조 원 피해... 무고한 시민 5명 목숨 잃어
전문가 "배터리 업계 리더십 부재"... 규제 강화·공공 교육이 해법
영국서만 연간 2조 원 피해... 무고한 시민 5명 목숨 잃어
전문가 "배터리 업계 리더십 부재"... 규제 강화·공공 교육이 해법
이미지 확대보기지난달 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도심부를 강타한 대형 화재의 발화 지점으로 전자담배(vape) 판매점이 정조준됐다. 불길은 역사적 건축물을 집어삼키고 영국 최대 철도 거점인 글래스고 중앙역까지 폐쇄했다. 모든 재앙의 출발점은 전자담배에 내장된 리튬이온 배터리였다.
이 사고는 예외적 불운이 아니다. 영국과 유럽 전역에서 배터리 관련 화재는 매년 가파른 증가세를 기록하고 있으며, 화재 과학자들은 기존 소방 체계로는 이 새로운 위험에 사실상 손을 쓸 수 없다고 경고한다. 기술의 확산 속도가 안전 규제를 압도하면서, 그 대가는 고스란히 시민에게 전가되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5년 새 17배... 수치가 증언하는 위기
가장 심각한 곳은 런던이다. 지난 2019년 12건에 불과했던 전기자전거 및 전기스쿠터 관련 화재는 지난해 206건으로 집계되며 17배 넘게 급증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배터리 폭발 사고가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전기 이동수단을 포함한 런던 내 전체 배터리 화재 역시 80건에서 521건으로 6.5배 늘어나며 일상의 모든 전자제품이 잠재적 화재원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스코틀랜드 역시 안전지대가 아니다. 같은 기간 스코틀랜드 내 배터리 관련 화재는 20건에서 69건으로 3.4배 증가했다.
수치 못지않게 충격적인 것은 피해자의 성격이다. 소방당국은 배터리 보급 속도가 규제와 안전 인식을 훨씬 앞질렀기 때문에 화재가 급증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최근 3년간 전기자전거·전기스쿠터 화재로 목숨을 잃은 5명은 모두 해당 기기를 소유하지 않은 무고한 제삼자였다. '남의 배터리'가 내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같은 층 이웃의 전기자전거, 복도에 방치된 전동킥보드 한 대가 공동주택 전체를 재앙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이 문제는 이미 개인 주의의 영역을 넘어섰다.
"가스 토치처럼 타오른다"... 소방 전문가들도 밤잠 설쳐
리튬이온 배터리가 기존 화재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열폭주(thermal runaway)'라는 연쇄 반응에 있다.
배터리 내부에 이상이 생기면 온도가 스스로를 가속시키며 통제 불가 상태로 치솟는다. 이 과정에서 고압의 독성 가스가 분출되고, 소화기와 스프링클러를 무력화하는 강렬한 화염이 가스 토치처럼 뿜어져 나온다. 외부 충격·과충전·제품 결함 가운데 하나만 발화 조건을 충족해도 연쇄 반응은 시작된다.
뉴캐슬대학교 폴 크리스텐슨 전기화학 교수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발화 확률 자체는 극히 낮다. 그러나 일단 발생했을 때의 위험도는 '매우, 매우 높다'"고 경고했다. 문제는 이 '극히 드문 사고'가 영국에서만 하루 평균 한 건 이상 터지고 있다는 냉혹한 현실이다.
임페리얼칼리지런던 기예르모 레인 화재과학 교수는 "리튬 배터리 화재는 감지 방법과 진압 방식 모두에서 기존 주택·공공건물 방화 시스템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껏 인류가 구축한 모든 방어층을 순식간에 관통해버리는 이 새로운 위험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는 말로 현장 전문가들의 무력감을 대변했다.
쓰레기통 하나가 2조 원을 날린다
피해는 직접 화재에 그치지 않는다. 폐배터리의 부적절한 처리가 2차 참사를 부른다.
일반 쓰레기봉투에 버려진 배터리가 수거 차량의 압착 과정에서 발화하거나, 재활용 처리 시설 컨베이어 위에서 파열되는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영국에서만 이로 인한 연간 경제적 손실이 10억 파운드(약 2조 원)를 웃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영국 전국소방서장협의회(NFCC) 전기안전 담당 리처드 필드는 "배터리가 고장 나면 결과는 파국적"이라며 "온라인 유통 채널에 대한 엄격한 감시와 제품 안전 기준의 실질적 집행이 절실하다"고 촉구했다.
규제는 기술을 못 따라가고, 업계는 침묵한다
영국 정부는 담배·전자담배 법안(Tobacco and Vapes Bill)을 통해 판매점 면허제 도입을 검토 중이다. 영국전자담배산업협회(UKVIA) 공동설립자 단 머천트는 "판매점이 제품의 법적 규격 준수 여부, 재활용 시스템, 전기 안전 수칙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인 교수는 업계의 소극적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배터리 산업은 지금껏 심각한 안전 문제에 정면으로 직면해본 적이 없어서인지, 리더십이 놀라울 정도로 부재하다"고 꼬집은 그는 "이미 가정 깊숙이 들어온 위험인 만큼, 이제는 규제만이 실질적 해법"이라고 결론 내렸다.
크리스텐슨 교수 역시 "리튬 배터리는 사회 전 계층에 깊이 파고들었지만, 위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턱없이 낮다"며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공공 안전 교육을 주문했다.
한국도 안전지대 아니다... 아파트 지하 주차장이 뇌관
이 위험은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에서도 전동킥보드·전기자전거 이용자가 빠르게 늘어나고, 무선이어폰·스마트워치 등 소형 배터리 내장 제품이 생활 전반에 확산하면서 리튬이온 배터리의 밀도가 해마다 높아지고 있다.
특히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충전 중인 전기자전거·전동킥보드에서 화재가 발생할 경우, 밀폐된 공간 특성상 유독 가스와 화염이 순식간에 퍼져 입주민 전체를 위협하는 대형 사고로 확산된 사례가 반복되고 있다. 국내 배터리 안전 전문가들은 영국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폐배터리 분리 배출 기준을 대폭 강화하고, 리튬 화재 전용 소방 지침과 진압 장비 도입을 서둘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배터리 화재는 이미 '불운한 사고'의 범주를 벗어났다. 기술이 먼저 들어온 자리에서 규제가 뒤따르지 못할 때, 그 공백을 메우는 것은 언제나 시민의 피해다. 매일 한 건 이상씩 터지는 배터리 화재가 언젠가 내 아파트 지하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상상, 이제는 지나친 기우로 치부할 수 없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