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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빵을 바꾼다... 자원 보유국들이 선포한 '에너지 중상주의'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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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와 빵을 바꾼다... 자원 보유국들이 선포한 '에너지 중상주의'의 역습

에너지를 담보로 식량과 기술을 요구하는 자원 강대국들의 패권 전략
시장 가격이 아닌 국가 간 직거래가 지배하는 신냉전 무역의 시대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11일(현지시각) 호르무즈해협 인근 페르시아만에서 유조선들이 항해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이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 11일(현지시각) 호르무즈해협 인근 페르시아만에서 유조선들이 항해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우리가 알던 자유무역의 시대가 가고 '실물 자산'이 지배하는 중상주의 시대가 돌아왔다. 이란 전쟁과 공급망 붕괴를 경험한 자원 보유국들은 이제 에너지를 단순한 상품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들은 석유와 가스를 담보로 상대국의 식량, 첨단 기술, 심지어 안보 보장까지 요구하는 노골적인 거래에 나서고 있다. 시장의 가격 결정 기제는 마비되었고 국가 간의 폐쇄적인 직거래와 '패키지 딜'이 세계 경제를 주무르고 있다.

벨기에 브뤼셀에 본부를 둔 유럽의 대표적인 경제 전문 싱크탱크 브뤼겔(Bruegel)은 20일(현지시각) '자원 민족주의의 귀환: 에너지 중상주의가 바꾸는 세계 경제 질서 (The Return of Resource Nationalism: How Energy Mercantilism is Reshaping the Global Economic Order)'라는 제하의 아티클을 통해 중동과 러시아 등 자원 강국들은 이제 에너지를 파는 조건으로 상대국의 핵심 자산이나 전략적 양보를 요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른바 '식량-에너지 패키지' 수출 전략인 것이다. 돈을 줘도 에너지를 구할 수 없는 시대가 오자 '자원을 가진 자가 룰을 정하는 공급자 우위 시장'이 고착화되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사라지고 국가의 거친 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의 파편화와 진영별 블록화


에너지 중상주의는 필연적으로 세계 경제를 진영별로 쪼개놓는다. 자원을 공유하는 국가들끼리만 폐쇄적인 경제 블록을 형성하고 외부인에게는 가혹한 조건을 내건다. 브뤼겔은 이러한 흐름이 글로벌 효율성을 저해하고 전 세계적인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심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한때 하나로 연결되었던 세계 시장은 이제 적대적인 섬들로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는 형국이다.

기술과 자원의 맞교환... 하이테크 국가들의 고심

반도체와 AI 기술을 가진 국가들도 자원 보유국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해 자신들의 핵심 기술을 넘겨줘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이는 '기술 안보'와 '에너지 안보'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을 만들어낸다. 자원 보유국은 기술을 흡수해 자립을 꿈꾸고 기술 보유국은 자원을 얻기 위해 미래의 경쟁력을 갉아먹는 위험한 거래가 횡행하고 있다.

신중상주의 시대의 새로운 인플레이션 경로


에너지 중상주의는 물가 상승의 구조적 원인이 된다. 효율적인 시장 거래가 아닌 정치적 비용이 포함된 직거래가 주를 이루면서 모든 자원의 가격은 상향 평준화된다. 중앙은행의 금리 정책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되는 것이다. 전 세계 중산층의 삶은 자원 보유국들의 변덕과 국가 간의 정치적 밀당에 의해 좌우되는 불안정한 시대로 진입했다.

자원 빈국 한국의 생존 방정식


에너지와 식량 모두를 수입에 의존하는 한국에게 신중상주의의 도래는 '국가적 재앙'에 가깝다. 우리는 이제 무엇을 내주고 에너지를 가져올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가 가진 반도체와 배터리 기술을 지렛대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강력한 안보 동맹을 통해 자원 확보를 보장받을 것인가? 시장에만 맡겨두던 자원 확보 전략은 이제 끝났다. 국가가 직접 나서서 자원 보유국과 치밀한 패키지 딜을 설계해야 할 때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haedang@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