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보조금 쏟아붓는 유럽… 국채 발행 급증에 투자자들 "사줄 사람이 없다"
독일-이탈리아 금리 격차 1%p 돌파… "성장률 밑도는 차입 비용, 부채 자동 팽창"
스태그플레이션 경고음 속 ECB, 금리 올리자니 재정 위기 내리자니 인플레이션
독일-이탈리아 금리 격차 1%p 돌파… "성장률 밑도는 차입 비용, 부채 자동 팽창"
스태그플레이션 경고음 속 ECB, 금리 올리자니 재정 위기 내리자니 인플레이션
이미지 확대보기이탈리아의 10년 만기 국채 금리는 지난 27일 한때 4.14%까지 뛰어올라 2024년 중반 이후 최고치를 경신했다. 프랑스와 스페인도 각각 3.9%, 3.7%에 육박하며 재정 위기의 기억이 생생한 수준을 다시 밟고 있다. 독일의 10년물 국채(분트) 금리는 현재 3.1% 수준에서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다.
금리 상승의 기저에는 단순한 인플레이션 우려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올해 유로존 주요국의 국채 발행 예정액은 1조2500억 유로(약 2171조 원)를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과거 유럽중앙은행(ECB)은 양적완화(QE)를 통해 대규모로 국채를 사들이며 시장의 '최종 매수자'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ECB는 2023년 3월부터 대차대조표 축소(양적긴축·QT)에 착수해 현재까지 자산을 단계적으로 줄여왔다. 사줄 주체는 줄었는데 팔아야 할 물량은 급증하는 구조, 이것이 지금 국채 금리를 밀어 올리는 핵심 엔진이다. 특히 환헤지 비용 상승으로 해외 투자자의 실질 수익률이 낮아진 점도 수요 둔화 요인으로 꼽힌다.
이미지 확대보기"에너지 잡으려다 나라 빚더미"… 재정 악화에 베팅 몰리는 시장
투자자들이 유로존 국채를 매도하는 직접적 이유는 재정 건전성에 대한 불신이다. 에너지 가격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각국이 쏟아내는 보조금 규모가 이미 감당 가능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스페인 하원은 지난 26일 전기·가스·연료에 부과되는 부가가치세(VAT)를 기존 21%에서 10%로 낮추는 50억 유로(약 8조6800억 원) 규모의 감세안을 가결했다. 이탈리아도 연료 소비세를 20% 인하하며 이달 7일까지 4억1700만 유로(약 7240억 원)를 투입한다. 재원 마련을 위해 이탈리아 정부는 의료 등 다른 분야의 예산을 삭감하는 고육책을 선택했다.
벨기에 싱크탱크 브뤼겔의 집계에 따르면 2021년 9월 에너지 위기 발발 이후 유럽 각국이 소비자 보호 명목으로 지출한 예산은 총 6510억 유로(약 1130조 원)에 달한다. 나티시스 CIB의 장 프랑수아 로뱅 리서치 책임자는 "각국이 에너지 충격 흡수를 위해 막대한 공공 자금을 쏟아붓고 있어 유로존 전반의 재정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는 쪽에 베팅이 집중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최근 보고서에서 과거의 에너지 지원 대책들이 "대상 설정이 부적절했고 막대한 재정 비용을 초래했다"며 이번 에너지 가격 충격을 완화하려는 시도들이 대부분 정부가 이미 직면한 예산 압박을 더욱 심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ECB, "올리자니 재정 위기, 내리자니 물가"… 정책 함정에 갇히다
시장 참여자들은 ECB가 올해 기준금리를 세 차례 인상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당초 기대됐던 금리 인하 시점은 상당 기간 뒤로 밀렸다. T. 로위프라이스의 토마스 비라덱 거시경제 전략가는 "저성장과 고물가가 맞물린 가운데 정부 지출만 불어나는 최악의 조합이 전개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ECB 집행이사 이사벨 슈나벨도 지난 27일 연설에서 "인플레이션의 망령이 되살아났다"며 예상보다 빠른 변화를 인정했다. 다만 2차 인플레이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데이터를 살펴볼 시간이 필요하다"며 즉각적인 통화 긴축에는 선을 그었다.
이탈리아·프랑스, "금리가 성장률을 넘어섰다"… 부채의 자동 팽창
이번 사태를 단순히 금리 수준의 문제로만 보면 본질을 놓친다. 더 심각한 구조적 리스크는 '차입 비용이 경제성장률을 웃도는 상황'이다. 경제가 빚보다 빠르게 성장하지 못하면 부채는 손을 쓰지 않아도 자동으로 불어난다.
이탈리아의 경제성장률은 연 1% 안팎에 그치는 반면, 10년물 국채 금리는 이미 4%를 넘었다. 격차가 3%포인트 이상이라는 의미다. 피무코(Pimco)의 콘스탄틴 바이트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현재의 금리 격차 확대가 즉각적인 위기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고금리·저성장 기조가 수년간 고착된다면 유로존 부채 구조 자체가 심각한 의문에 직면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국내 주요 증권사의 유럽 채권 담당 관계자는 "문제의 핵심은 금리의 절대 수준이 아니라, 성장률을 웃도는 차입 비용 구조"라며 "이 상태가 지속되면 재정 건전화 노력 없이도 부채는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른바 '스프레드(spread)'로 불리는 이탈리아와 독일 간 국채 금리 격차도 분쟁 전 0.6%포인트에서 최근 1%포인트까지 확대됐다. 유럽 재정위기 당시 이 수치는 5~6%포인트에 달했다. 아직 위기 수준은 아니지만, 구조적 위험 프리미엄이 다시 붙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비라덱 전략가는 "독일 금리가 3.5%를 넘고 이탈리아·프랑스의 차입 비용이 5%에 근접한다면 부채 지속 가능성이 불투명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방비·보조금·재정 적자… 빈 금고에 써야 할 곳만 늘어났다
현재 유로존이 안고 있는 부담은 2022년 에너지 위기 당시보다 복잡하다. 당시와 달리 지금은 국방비 증액, 에너지 전환 투자, 노령화 사회에 따른 복지 지출 등 구조적으로 재정 압박 요인이 중첩되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 여력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가 프랑스다. 프랑스 정부는 내년 말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 적자 목표치인 5.1%를 지키기 위해 에너지 보조금 지급에 선을 긋고 있다. 써야 할 돈은 늘었는데 금고는 이미 비어 있다는 뜻이다.
이 상황에서 ECB가 양적완화를 재개해 국채를 대거 매입할 가능성은 낮다. ECB는 QT를 진행하는 와중에 팬데믹 긴급매입프로그램(PEPP)의 만기 재투자도 순차적으로 중단했다. 결과적으로 국채 공급은 증가하는 반면, ECB라는 강력한 매수자는 시장에서 이미 물러선 상태다.
한국에 주는 경고, 유럽 금리 불안은 한국 수출·금융에 이중 파장
유로존의 재정 불안은 한국 경제와 무관하지 않다. 첫째, 유럽 경기가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으로 접어들 경우 대유럽 수출 비중이 높은 자동차·화학·철강 업종에 타격이 불가피하다. 현대차, 기아 등 국내 완성차 업체의 유럽 시장 점유율이 꾸준히 높아진 상황에서 현지 소비 위축은 직격탄이 될 수 있다. 둘째, 유로존 국채 금리가 급등하면 글로벌 채권 포트폴리오의 재조정이 발생하면서 한국 국채를 비롯한 신흥국 채권에서도 자금 이탈 압력이 커질 수 있다. 국내 외국인 채권 보유 비중이 높은 현시점에서 환율과 금리 변동성이 동반 확대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
투자자가 지금 당장 봐야 할 지표 3가지
이번 국채 시장 불안이 일시적 출렁임에 그칠지, 아니면 구조적 위기로 번질지를 판단하려면 세 지표를 함께 살펴야 한다.
첫째, 독일 10년물 분트 금리다. 현재 3.1%에서 3.5%를 돌파하면 이탈리아·프랑스의 스프레드 확대가 본격화되는 임계점으로 시장이 경계하는 수준이다.
둘째, 이탈리아-독일 국채 스프레드다. 현재 1%p 수준. 2%p 이상으로 벌어지면 재정 위기 가시화 신호로 해석해야 한다.
셋째, ECB 정책 회의 성명문의 '분절화(fragmentation)' 언급 여부다. ECB가 분절화 억제를 위한 시장 개입 카드(TPI·전환보호수단)를 꺼내는 시점이 위기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너지 충격이 재정으로, 재정이 금리로, 금리가 다시 성장 억제로 이어지는 연쇄 고리가 얼마나 빨리 작동하느냐에 따라 유로존의 이번 국채 소용돌이의 깊이가 결정될 것이다. 투자자들은 향후 발표될 경제 지표보다 각국 정부의 부채 관리 의지와 ECB의 '시장 방어선' 유지 여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할 것으로 보인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 국면의 본질은 단기 금리 변동이 아니라, 유로존이 다시 ‘재정-통화 정책 충돌 구조’로 회귀하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