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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봉쇄로 EU 연료 배급제 현실화… 한국 제조업 생산비 12% 증가 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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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봉쇄로 EU 연료 배급제 현실화… 한국 제조업 생산비 12% 증가 경보

호르무즈 봉쇄 장기화… EU, 항공유·디젤 배급제 및 전략 비축유 추가 방출 등 총가동 검토
"에너지 가격, 아주 장기간 높은 수준 지속”…EU 에너지 집행위원, 역대 최악 공급 충격 경보
위기의 본질은 원유 부족이 아닌 '정제제품 단위 쇼크'…항공유·디젤은 대체 불가
봉쇄 3개월 이상 지속 시 한국 제조업 생산비 최대 11.8% 급등, 성장률 1.7%대 추락 전망
EU가 중동 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해 연료 배급제와 전략 비축유 추가 방출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검토 중이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EU가 중동 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해 연료 배급제와 전략 비축유 추가 방출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검토 중이다. 이미지=제미나이3
원유 의존도 95% 이상을 중동에 의존하는 한국에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2026년 봄, 유럽연합(EU)이 꺼내 든 '연료 배급제'라는 단어는 단순한 위기대응 구호가 아니다. 그것은 지정학적 충격이 시장 메커니즘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시스템 경보다.

파이낸셜타임스(FT)3(현지시각) 보도에서 EU가 중동 분쟁으로 촉발된 에너지 위기에 대응해 연료 배급제와 전략 비축유 추가 방출을 포함한 '모든 가능한 수단'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댄 예르겐센(Dan Jørgensen) EU 에너지·주거 담당 집행위원은 FT 인터뷰에서 "이번은 장기 위기가 될 것이며, 에너지 가격은 매우 오랜 시간 높은 수준에 머물 것"이라고 밝혔다.

EU, ‘중동발 에너지 충격’ 단계별 대응 전략. 도표=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EU, ‘중동발 에너지 충격’ 단계별 대응 전략. 도표=글로벌이코노믹


배급제가 돌아온 까닭… 1973년 이후 최대 공급 충격


배급제(Rationing). 1970년대 오일 쇼크 당시 유럽과 미국이 한시적으로 시행했던 이 조치가 반세기 만에 다시 수면 위로 올랐다. 당시와의 차이점은 명확하다. 1973년에는 원유 공급 자체가 줄었다. 지금은 다르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이번 호르무즈 봉쇄 사태를 "현대 역사상 최대 규모의 원유 시장 공급 충격"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충격의 핵심은 원유 자체의 부족이 아니라 정제제품 공급망의 붕괴에 있다. 유로뉴스(Euronews)EU가 중동으로부터 정제 연료인 디젤과 항공유를 각각 40% 이상 조달하고 있으며, 이 공급망이 직격탄을 맞았다고 보도했다. 항공유와 디젤은 전기차나 가스로 대체할 수 없는 '대체 불가 제품'이다. 산업 물류, 항공 운항, 군사 작전이 모두 이 연료에 의존한다.

유럽가스 벤치마크 TTF 선물 가격은 최근 한 달 새 85%까지 폭등해 메가와트시(MWh)55유로(95700)를 넘었다. 일부 분석 기관은 봉쇄가 4월을 넘기면 EU 내 일부 회원국이 3단계 에너지 배급(산업 생산보다 가정 난방을 우선 공급하는 형태)을 실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슬로베니아는 EU 회원국 중 처음으로 주유소에서 개인 150리터 구매 상한을 도입했고, 오스트리아는 연료세를 인하하는 동시에 소매 마진에 상한을 설정했다.

시장 가격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배급제는 불필요하다.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고 공급이 늘어나는 자동 조절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공유나 디젤처럼 '없으면 산업이 멈추는' 물자는 아무리 가격이 올라도 수요가 탄력적으로 줄어들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가가 시장 대신 직접 수요를 통제하는 배급제가 등장한다. EU의 배급제 검토는 선언이 아니라, 시장 기반 에너지 체계가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는 신호다.

비축유 추가 방출 카드… '러시아 LNG 퇴출' 원칙은 고수


예르겐센 집행위원은 EU가 전략 비축유를 추가 방출하는 방안도 배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EU 회원국들은 이미 IEA가 조율한 전략 비축유 4억 배럴 방출의 약 20%를 분담했다. 이는 역대 최대 규모다. 그는 "상황이 더 나빠지면 추가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면서도 방출 시점에 대해서는 "가장 적절한 때에 비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며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주목할 대목은 EU'전략적 모순'이다. EU는 올해 안에 러시아산 액화천연가스(LNG)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기존 입장을 굽히지 않겠다고 재확인했다. 러시아 LNG 금지 → 공급 부족 심화 → 미국산 LNG 의존 확대. 이 구조는 'EU가 정치적 탈러시아를 달성하는 대신, 훨씬 비싼 미국산 LNG에 구조적으로 종속되는' 결과를 낳는다.

에너지 주권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에너지 종속이 심화되는 역설이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이를 '비용 상승형 탈세계화'라고 부른다. 벨기에 LNG 운영사 플럭시스(Fluxys)는 미국·나이지리아 등 대체 공급처를 긴급 탐색 중이며, 이탈리아는 알제리로부터 가스 추가 도입 협상에 나섰다. 대체 물량을 확보할수록 가격 프리미엄을 더 얹어줘야 하는 구조가 굳어지는 것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아직 공식적인 '공급 안보 위기' 단계 진입은 선언하지 않았다. 그러나 집행위는 항공유 동결점 기준 완화(미국 기준 -40, EU -47℃의 차이를 조정해 양측의 상호 수입을 허용), 에탄올 혼합 비율 조정 등 기존 환경 규제 완화까지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 기준에 손을 대는 것 자체가 수급 상황의 절박성을 보여주는 지표다.

거시경제로의 전염 경로… 디젤發 '비용 인플레이션' 통화 긴축으로 못 막는다


에너지 충격은 단순한 연료값 인상에 그치지 않는다. 그 충격이 경제 전반으로 번지는 경로는 다음과 같다.

디젤 가격 상승 → 화물·물류비 급등 → 식품·공산품 가격 상승. 항공유 상승 → 항공 운임 폭등 → 서비스 물가 자극. 에너지 생산비 상승 → 철강·화학 등 제조업 원가 급등 → 산업 생산성 하락이다.

이런 구조는 '비용 인플레이션(cost-push inflation)'이다. 과잉 수요가 아닌 공급 측 충격에서 비롯된 물가 상승이기 때문에, 금리 인상 같은 통화 긴축 정책으로는 통제하기 어렵다. 금리를 올려봐야 디젤 공급이 늘어나지 않는다. 유럽은 '스태그플레이션', 즉 물가가 오르는 동시에 경기가 침체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 직격탄… 봉쇄 3개월 넘으면 제조업 생산비 12%, 성장률 1%대로 추락


이 충격은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은 구조적으로 더 취약하다.

한국은 도입 원유의 95% 이상, LNG20% 이상을 중동에서 조달한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지 않는 공급선은 사실상 없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2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전쟁이 조기에 끝난다 해도 국제 유가는 전쟁 전 수준(배럴당 63달러)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조기 종전 시나리오에서도 배럴당 90달러(135700), 봉쇄 장기화 시 117달러(176500)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산업연구원은 봉쇄가 3개월 이상 지속될 경우 한국 제조업 평균 생산비가 11.8% 상승할 것으로 추산했다. 전 산업 평균으로도 9.4% 오른다. OECD는 이번 사태로 한국의 2026년 경제성장률이 기존 전망치 2.1%에서 1.7%로 후퇴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 하락폭은 주요국 가운데 가장 크다. 증권가에서는 "봉쇄 장기화 시 한국의 성장률은 1%대 초반으로 떨어지고, 소비자물가는 5%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실물 충격도 이미 시작됐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현재 호르무즈 해협에는 원유선 7척이 발이 묶여 있으며 이들이 국내 항구에 도착하기까지 최소 22~23일이 소요된다. 양기욱 산업부 산업자원안보실장은 지난 42일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전쟁을 끝내더라도 산업부가 맞닥뜨린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위기 상황의 장기화를 우려했다. 공급망 정상화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필요하다는 진단이다.

업계에서도 단기적인 분쟁은 비축분으로 버틸 수 있지만, 봉쇄가 수개월 이상 이어지면 국내 제조·수출 역량에 심각한 훼손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에너지 집약 산업 구조의 근본적 개선과 공급망 다변화를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한국 정부는 약 208일분(원유·석유제품 기준)의 비축유를 보유 중이며, 자원안보 위기경보를 '경계' 단계로 격상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호르무즈를 경유하지 않는 대체 공급선을 신속히 발굴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정부 대책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UAE 푸자이라 우회 송유관, 사우디의 홍해 동서 송유관(ESTP), 오만 살랄라항 환적 등 대안 경로가 있지만 모두 처리 용량에 한계가 있어 전체 물량을 대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에너지 안보, 이제는 외교·군사 전략의 최전선


이번 위기가 던지는 가장 깊은 질문은 이것이다. '에너지 안보는 경제 정책인가, 안보 정책인가.' 유럽에서는 이미 답이 나오고 있다. EU'에너지 안보 주권법(Emergency Energy Sovereignty Act)' 초안을 작성 중이며, 여기에는 더 높은 가스 저장 의무, 북미·서아프리카 공급 전용 재기화 터미널 건설 지원 등이 포함될 것으로 알려졌다. G7 정상들은 330일 성명을 통해 에너지 시장 안정화를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한국의 과제는 더 복잡하다. 에너지 위기에 미·중 전략경쟁, 북핵 위협이 겹친 '삼중 함정' 구조 속에서 에너지 주권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OECD는 에너지 효율 개선, 공급처 다각화, 친환경 에너지 전환을 핵심 정책 과제로 제시했다. 업계에서는 트럼프 행정부가 방위비, 원자력협정, 관세 카드를 한데 묶어 한국을 압박할 수 있다고 외교안보 차원의 복합 리스크도 발생할 수 있어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호르무즈 봉쇄 위기는 반복되는 구조적 리스크다. 이번에야말로 임기응변식 대응이 아닌, 에너지 안보를 안보 전략의 핵심으로 격상시키는 구조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EU가 배급제를 꺼내 드는 것을 먼 나라 이야기로만 볼 수 없다. 한국의 공장, 주유소, 비행기가 멈추기 전에 대비해야 한다.

한편 시장 참여자들은 향후 사태 전개와 관련 추이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첫째, 호르무즈 유조선 통과 건수(평시 하루 50척 → 현재 0~1. 재개 여부가 에너지 위기 '출구 신호') 둘째, TTF(유럽 천연가스) 가격 변화(현재 MWh55유로 내외. 60유로 돌파 시 EU 배급제 실시 가능성 급등) 셋째, 국내 소비자물가 중 석유류·공업제품 항목 변화(디젤발 비용 인플레이션의 국내 전염 속도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지표)를 주목할 때라고 말한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