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포기한 유럽 4개국, 에너지 수입 의존도 50% 돌파…에너지 주권 상실 경고
EU, SMR 2030년대 상용화 목표…2050년까지 53GW·2410억 유로 투자 계획
EU, SMR 2030년대 상용화 목표…2050년까지 53GW·2410억 유로 투자 계획
이미지 확대보기한국전력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산업용 전기요금이 연일 논란이 되는 지금, 유럽에서는 전기요금 문제가 이미 산업 붕괴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중동 분쟁으로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서 국제 에너지 가격이 다시 급등세를 타는 가운데, '탈원전'을 택했던 유럽 국가들이 뒤늦게 원자력 발전 재가동을 서두르고 있다.
영국 BBC는 4일(현지시각) 유럽 주요국의 원전 정책 급선회를 상세히 보도했다. 원전을 지킨 나라와 버린 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기요금 격차는, 에너지 정책 하나가 국가 경제의 명운을 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프랑스 전기요금의 5배…독일이 치른 탈원전 청구서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한다. 선물 시장 기준으로 다음달 독일 전기요금은 프랑스의 5배에 달한다. 발전량의 65%를 원자력으로 충당하는 프랑스와, 2011년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을 모두 끈 독일의 엇갈린 운명이다.
독일의 자동차·화학 산업이 가스 의존 구조에 발목 잡힌 사이, 베를린의 주요 경제연구소들은 올해 독일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를 0.6%로 대폭 낮췄다.
가스가 전기요금의 90%를 좌우하는 이탈리아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풍력과 태양광에 집중투자한 스페인의 올해 하반기 평균 전기요금이 이탈리아의 절반 수준에 그칠 것으로 예측되는 것과 뚜렷하게 대비된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최근 파리에서 열린 유럽 원자력 정상회의에서 이 흐름을 정면으로 짚었다. 그는 유럽이 원자력을 외면한 것을 "전략적 실수"라고 직접 표현했다.
1990년 전체 발전량의 약 3분의 1을 담당하던 원자력 비중이 현재 평균 15%로 떨어진 결과, 유럽은 에너지 소비량의 50% 이상을 수입에 기대는 처지가 됐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공급망이 한 차례 흔들렸고, 이번에는 중동발 충격이 또다시 유럽의 에너지 취약성을 건드리고 있다.
이탈리아·벨기에·스웨덴 잇따라 유턴…SMR이 새 판을 짜다
위기의식이 임계점을 넘자 각국 정책이 속도를 내고 있다. 이탈리아는 원전 금지 조항을 폐지하는 법안 초안을 마련 중이고, 벨기에는 수년간의 반원전 기조를 전면 뒤집는 분위기다.
스웨덴은 40년 넘게 고수해온 탈원전 방침을 공식 철회했고, 지진 위험으로 원전에 소극적이던 그리스도 첨단 원자로 설계를 놓고 공론화에 들어갔다. 영국에서는 레이첼 리브스 재무장관이 핵심 규제 간소화를 밀어붙이며 "에너지 안보와 경제 성장을 위해 원자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못 박았다.
이 흐름의 중심에는 소형모듈원자로(SMR)가 있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달 10일 SMR 및 첨단모듈형원자로(AMR)의 개발·배치를 가속화하는 전략을 공식 발표했다.
EU 집행위원회 댄 예르겐센 에너지 담당 집행위원은 "SMR은 안전한 원자력 기술로, 신뢰할 수 있는 자체 청정에너지 공급과 산업 경쟁력 강화, 에너지 안보 확보에 기여할 수 있다"며 "연구에서 구체적인 프로젝트로 넘어가는 명확한 경로를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EU는 2050년까지 역내 SMR 설비 용량이 17기가와트(GW)에서 53기가와트(GW)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으며, 목표 달성을 위해 총 2410억 유로(약 419조원)의 투자가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SMR은 공장에서 모듈 단위로 생산해 현장 조립이 가능하고, 대형 원자로보다 건설 기간이 짧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와 수소 생산, 지역난방까지 다양한 분야에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미국과 일본이 테네시주·앨라배마주에 400억 달러(약 60조원) 규모의 SMR 공동 개발 프로젝트를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폴란드에서도 최근 신토스 그린 에너지(SGE), 폴리멕스 모스토스탈, ATEC 그룹 등 3개사가 중동부 유럽 지역 SMR 배치를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며 유럽 내 SMR 확산에 속도가 붙는 양상이다.
"기존 원전 수명 연장도 벅차"…낙관론 뒤에 가려진 현실
원전 부활론 뒤에는 현실적 장벽이 적지 않다. 채텀하우스 환경·사회센터 크리스 에이렛 연구원은 "유럽 원자력의 역사를 무시하고 원전이 에너지 위기의 손쉬운 처방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은 착각"이라며 "기존 원전 수명을 연장하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돈이 든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원전 비중을 실질적으로 늘리려면 시간과 재원이 엄청나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프랑스 플라망빌-3 원전과 영국 힝클리 포인트 C는 수십 년에 걸친 공사 지연과 비용 초과의 대표 사례다. SMR도 아직 상업 규모의 실증 사례가 없고, EU 역내에서 건설 허가를 받은 곳도 없다.
헝가리·슬로바키아 등 중·동유럽 일부 국가들이 러시아산 원자로 기술과 우라늄에 여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점도 에너지 자립의 걸림돌이다.
환경단체들은 원전 투자가 재생에너지 확대에 쓰일 예산과 정책적 동력을 빼앗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에이렛 연구원은 "원전은 중·장기 해법이지, 지금 당장 에너지 가격을 끌어내릴 수 있는 처방전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탄소 중립 목표 달성을 위해 2050년까지 전 세계 원전 설비 용량을 현재의 2배 이상으로 늘려야 한다고 분석했지만, 그 목표와 현재 유럽의 재정 여건·건설 역량 사이의 간극은 크다.
원전 르네상스를 선언하는 목소리는 높아졌지만, 실제 전기요금 청구서가 달라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