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쇼크에 실질임금 역전…글로벌 소비 다시 꺾인다
국가별 재정·제도 체력 따라 충격 차별화…한국 '수출-내수' 괴리 심화
국가별 재정·제도 체력 따라 충격 차별화…한국 '수출-내수' 괴리 심화
이미지 확대보기이란 전쟁으로 촉발된 중동 분쟁이 호르무즈 해협을 가로막으면서 공급망 교란이 물가를 끌어올리며 선진국 실질임금을 다시 잠식하기 시작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26일(현지시각) 호르무즈 해협 위기로 미국과 영국 등지에서 물가상승률이 임금 상승률을 앞지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휘발유 가격과 항공료가 가파르게 뛰면서 2022년 인플레이션 충격에서 겨우 벗어나던 글로벌 가계 소비는 다시 위축될 처지에 놓였다.
미국·영국 노동자 직격탄…2년 만에 역전된 임금·물가 시소게임
미국 노동시장은 2년 만에 처음으로 물가가 임금을 앞지르는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미국의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간 3.8%로 급등한 반면, 시간당 평균 임금은 전년 대비 3.6%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 격차는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다시 축소 국면에 진입했음을 의미하며, 휘발유 고공행진이 실질 임금의 초기 회복세를 저해하는 주된 원인으로 꼽힌다.
영국 노동자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보너스를 제외한 영국의 실질 평균 임금은 3월까지 3개월 동안 연간 0.1% 증가에 머물렀다. 고용 시장이 부진한 가운데 향후 물가가 추가로 오르면 실질 임금은 하락 전환이 확실시된다. 영국 정부가 여름 휴가철 부가가치세 인하와 유류세 인상 연기 카드를 꺼냈지만, 연구기관 레졸루션 재단의 제임스 스미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이를 두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 4번째로 고착화하는 실질 임금 하락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평가했다.
유럽연합도 '임금 동결' 위기…재정 여력 따라 국가별 차별화
유로존 전체로 보면 이번 에너지 충격은 잔인한 악재다. 컨설팅회사 판테온 매크로이코노믹스는 2026년 유로존 전역의 실질 임금 상승률이 0%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유로존은 지난해 사상 최저 수준의 실업률 덕분에 직원 1인당 보상이 거의 2% 증가하며 회복세를 보였다. 그러나 최근 유럽중앙은행(ECB)이 추적하는 협상 임금 지표를 보면 고용 안정에 불안감을 느낀 노동조합들이 올해 임금 인상 요구 관철에 어려움을 겪는 상태다.
주목할 점은 같은 에너지 쇼크지만, 각국의 재정·제도·저축 구조에 따라 실질임금 충격의 형태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는 소비자를 보호할 재정 여력이 없어 실질 임금 상승률이 이미 심각한 마이너스를 기록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판테온 매크로이코노믹스의 클라우스 비스테센 이코노미스트는 "프랑스는 세금을 깎아줄 재정적 여유가 없어 소비자들이 정말 큰 부담을 안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면 독일은 노동자들의 임금 협상력이 떨어졌음에도 정부의 유류세 인하 조치 덕분에 당장의 물가 충격을 방어하고 있다. 스페인의 경우는 임금 물가 연동제와 두터운 가계 저축 완충 장치, 정부의 관대한 재정 지원 덕분에 미국이나 프랑스보다 타격이 적다는 평가를 받는다. 영국 경제연구소 캐피털 이코노믹스의 앤드류 케닝햄 수석 유럽 이코노미스트는 "이란 전쟁으로 인한 타격이 2022년 에너지 위기 때보다는 작지만, 유로존 경제가 완만한 경기 침체에 빠질 가능성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 경제안보 최전선…'수출 호황-내수 침체' 괴리 심화
중동 분쟁발 에너지 충격은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월급봉투마저 위협한다. 한국의 명목임금은 최저임금이 시간당 1만 320원으로 오르는 등 외견상 상승세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고환율과 국제 유가 급등 여파로 수입 물가가 치솟으면서 근로자들의 실질 구매력은 제자리걸음을 걷거나 되레 깎이는 모양새다.
특히 반도체 중심의 수출 회복세에도 불구하고 고환율·에너지 비용 상승 압박이 기업 내부에서 흡수되면서, 임금과 고용으로의 온기 파급은 지연되고 있다. 제조업과 서비스업 전반에서 비용 부담이 커진 탓에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는 더욱 벌어지는 구조다. 리스크를 상쇄할 완충 요인으로 정부의 유류세 환원 속도 조절이 가동 중이지만, 결국 수출 호황과 내수 침체의 괴리가 다시 확대되는 국면을 막기에는 한계가 뚜렷하다.
스태그플레이션 갈림길…두 가지 시나리오와 자산 배분 전략
실질 임금 감소는 정책 입안자들에게 두 가지 상반된 공포를 유발한다. 첫째는 가계가 지출을 줄여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경제 성장을 더욱 악화시키고, 수요 둔화로 기업들이 구조조정에 나서는 둔화 시나리오다. 둘째는 노동자들이 물가 보전을 요구하며 가파른 임금 인상을 이끌어내 에너지 가격이 내린 뒤에도 인플레이션이 고착화하는 시나리오다.
미국 금융사 JP모건의 마이클 페롤리 수석 미국 이코노미스트는 "호르무즈 해협이 재개되고 에너지 가격이 하락하면 실질 임금이 다시 상승할 것"이라는 낙관론을 폈지만, 스웡크 이코노미스트는 높은 물가가 기업 이윤을 갉아먹고 고용 시장을 파괴하는 악순환을 유발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최근 이란 최고 협상단이 카타르 도하를 방문해 해협의 단계적 재개방을 포함한 평화 협정을 조율 중이라는 소식은 시장의 숨통을 틔우는 완충 요인이다. 에너지 가격이 고점에서 유지되는 변동성 장세에서는 자산 포트폴리오의 재조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방어적 포지셔닝은 호르무즈 해협의 수송 정상화 신호가 확인되기 전까지 유효한 단기 전략으로 해석된다.
마진 압박이 불가피한 소비재, 항공, 화학 업종은 당분간 방어적인 접근이 유효하며, 공급망 교란의 반사이익을 얻는 에너지, 방산, 원자재 관련 업종은 상대적 강세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 국내 투자자와 수출 기업들은 글로벌 경기 침체 갈림길에서 다음 세 가지 지표를 행동 단서로 삼아야 한다.
첫째, 원유 수송량 변동성이다. 도하 외교 협상에 따른 호르무즈 해협의 일일 원유 수송량 회복 속도를 뜻한다. 공급망 정상화와 에너지 가격 안정을 가늠할 핵심 선행 지표다.
둘째, 미국 기대인플레이션율 변화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경로를 결정할 가계의 단기 물가 전망치다. 금리 인하 시점과 글로벌 유동성 방향성을 보여주는 나침반이다.
셋째, 소비재 기업 영업이익률 변화다. 비용 상승분을 가격에 전가하지 못해 마진 압박을 받는 한계 기업의 실적 변동이다. 불황기 투자처를 선별할 때 반드시 봐야 할 장부다.
글로벌 공급망 마비로 촉발된 실질 임금 하락은 단순한 가계 부담을 넘어, 경기 둔화가 뒤늦게 본격화되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