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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인물] 앨런 그린스펀 "영원한 세계의 돈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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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인물] 앨런 그린스펀 "영원한 세계의 돈 대통령"

그린스펀 전 미국 연준의장/사진= 로이터 이미지 확대보기
그린스펀 전 미국 연준의장/사진= 로이터
영원한 세계의 돈 대통령으로 불리던 그린스펀 전 연준 의장이 타계했다. 향년100세이다.

그린스펀은 1926년 3월 6일, 뉴욕 브루클린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유년 시절은 1929년 몰아친 대공황의 암운과 궤를 같이한다. 주식 중개인이었던 아버지는 대공황의 직격탄을 맞고 가정을 떠났다. 그린스펀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양육 하에 외롭게 성장했다. 이러한 환경은 그로 하여금 현실 경제의 냉혹함을 본능적으로 체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소년 시절의 그린스펀은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으나, 동시에 음악에도 깊은 조예를 가졌다. 명문 줄리어드 음대에 진학하여 클라리넷과 색소폰을 전공한 그는 1940년대 중반 헨리 제롬(Henry Jerome) 댄스 밴드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전문 음악가의 길을 걷는 듯했다.

연주 여행 중에도 대기실에서 회계학과 경제학 서적을 탐독하던 그는, 예술적 영감보다 숫자가 주는 명징함에 자신의 미래가 있음을 깨닫고 뉴욕 대학교(NYU)에 입학하여 경제학으로 진로를 전환한다. 이후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전설적인 경제학자 아서 번즈(Arthur Burns)를 사사하며 계량경제학과 경기 순환 이론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그린스펀의 경제 철학을 이해함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아인 랜드(Ayn Rand)이다. 1950년대 초, 그린스펀은 랜드가 주창한 '객관주의(Objectivism)' 학파의 핵심 일원이 되었다. 랜드의 철학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와 규제 없는 순수 자본주의, 그리고 정부 개입에 대한 강력한 거부를 골자로 한다.초기의 그린스펀은 국가의 중앙은행 제도 자체를 불신하는 철저한 자유시장주의자였다. 그는 1966년 랜드의 저서에 기고한 글에서 "금본위제가 없는 상태에서는 인플레이션을 통한 재산 몰수를 막을 방법이 없다"라며 정부의 자의적인 통화 발행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러한 철학적 기반은 훗날 그가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도 금융 시장에 대한 규제를 최소화하고, 시장의 자정 능력을 맹신하게 만드는 심리적 기저로 작용하게 된다.
민간 경제 분석 회사인 '타운센드-그린스펀(Townsend-Greenspan & Co.)'을 설립해 수십 년간 월가의 신뢰를 받는 최고의 컨설턴트로 명성을 쌓은 그는, 이 사상적 무기를 바탕으로 서서히 워싱턴 정계의 부름을 받기 시작한다. 그린스펀의 정계 진출은 1968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 후보의 경제 자문역을 맡으면서 본격화되었다. 이후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장을 역임하며 거시경제 정책의 사령탑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결정적인 전기는 1987년에 찾아왔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강력한 고금리 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을 잡았던 폴 볼커(Paul Volcker)의 후임으로 앨런 그린스펀을 제13대 연준 의장으로 임명했다. 1987년 8월, 그가 연준의 지휘봉을 잡았을 때 전 세계는 냉전의 종식을 목전에 두고 있었고, 자본주의는 유례없는 확장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취임의 기쁨도 잠시, 불과 두 달 만에 전 세계 금융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재앙이 그를 시험대에 올렸다 1987년 10월 19일, 뉴욕 증시가 하루 만에 22.6% 폭락하는 '블랙 먼데이(Black Monday)'가 발생했다. 전 세계 금융 시스템이 마비될 위기에 처하자, 취임 직후였던 그린스펀은 신속하고 단호하게 움직였다. 그는 "연준은 경제와 금융 시스템을 지원하기 위해 유동성 공급의 원천으로서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짤막하지만 강력한 성명을 발표하며 시장에 무제한적인 자금을 투입했다. 이 기민한 대처로 공황의 확산을 막아내며 그는 단숨에 월가의 구세주로 떠올랐다.대안정기(Great Moderation)와 모호성의 예술이후 그린스펀은 2006년 퇴임할 때까지 조지 H.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등 정권이 세 번 바뀌는 동안 다섯 차례나 연임하며 18년 6개월간 세계 경제의 사령탑으로 군림했다.

1990년대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 정보통신(IT) 기술 혁명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을 정확히 꿰뚫어 본 그는 전통적인 경제학 공식(실업률이 낮아지면 인플레이션이 온다는 필립스 곡선)을 과감히 탈피했다. 그는 낮은 실업률 속에서도 금리 인상을 늦추는 혜안을 발휘하여 미국 역사상 최장기 호황을 이끌었다.그의 말 한마디에 지구촌 전체가 일희일비하자, 그는 의도적으로 극도로 난해하고 모호한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그린스펀 화법(Greenspanese)'이다. 청문회에서 그가 남긴 다음의 명언은 그의 통화정책 스타일을 단적으로 대변한다."만약 당신이 내 말을 너무 명확하게 이해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내가 말을 잘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광의 이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린스펀은 시장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금리를 낮추어 자산 가격을 떠받치는 정책을 반복했다. 시장 참가자들은 이를 두고 "그린스펀이 언제나 하락 제동 장치(Put Option)를 제공해 준다"라며 '그린스펀 풋(Greenspan Put)'이라 불렀다. 이로 인해 시장에는 위험을 불사하는 도덕적 해이가 만연하기 시작했다.2000년 닷컴 버블이 붕괴하고 2001년 9·11 테러가 발생하자, 그린스펀은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당시로서는 역사적 최저 수준인 1.0%까지 급격히 인하했다. 그리고 이 초저금리 상태를 장기간 유지했다. 이 풍부한 유동성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 들어갔고, 금융기관들은 규제가 완화된 틈을 타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무분별하게 주택 담보 대출을 실행하는 '서브프라임 모기지(Subprime Mortgage)' 상품을 양산했다.

그는 자본주의 시장의 참여자들이 스스로 위험을 관리할 것이라 확신했으나, 탐욕에 눈이 먼 금융 시스템은 그의 예측을 비웃듯 붕괴해 가고 있었다2006년 1월, 앨런 그린스펀은 세계 경제의 신(神)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명예롭게 연준 의장직에서 퇴임했다. 영국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고, 그의 회고록 출간에는 천문학적인 인세가 책정되었다.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퇴임한 지 불과 1~2년 만인 2007~2008년, 그가 남긴 유산인 부동산 버블이 전면적으로 폭발하며 글로벌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강타했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고 세계 경제가 대공황 이후 최악의 파국으로 치닫자, 대중과 학계의 화살은 일제히 그린스펀을 향했다.
2008년 10월, 미국 하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그린스펀은 평생을 지켜온 자신의 신념에 오류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헨리 왁스먼 위원장이 "당신의 세상 정론, 즉 자유시장이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신념에 결함이 발견된 것인가"라고 묻자, 그린스펀은 굳은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답했다."그렇습니다. 결함이 있습니다. 내 평생의 사상적 기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자유시장 경제의 자정 능력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던 대가의 처절한 자기 고백이자, 한 시대의 종언을 고하는 순간이었다. 앨런 그린스펀의 생애는 시장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간의 오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적 통화정책가적 통찰력이 교차하는 복합적인 대서사이다.인류는 그를 통해 인플레이션 없는 장기 호황이라는 풍요를 누렸으나, 동시에 통제되지 않은 탐욕이 가져오는 파멸의 깊이를 학습하게 되었다. 그가 남긴 족적은 여전히 전 세계 중앙은행가들에게 가장 거대한 교과서이자 동시에 가장 뼈아픈 반면교사로 남아있다. 시장을 신으로 모셨으나 결국 그 시장의 파도에 휩쓸려 명예의 성좌에서 내려와야 했던 인물. 앨런 그린스펀, 그의 일생은 자본주의의 영광과 상처 그 자체였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