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美 안 가고 현지서 고친다"… 韓·日·필리핀 조선소, 美 함대 ‘수리 거점’ 부상

글로벌이코노믹

"美 안 가고 현지서 고친다"… 韓·日·필리핀 조선소, 美 함대 ‘수리 거점’ 부상

자국 조선업 붕괴 직면한 미국, 인도·태평양 잠재 분쟁지 인근 동맹국 MRO 거점 전격 육성
韓 한화오션·HD현대에 이어 HJ중공업·SK오션플랜트 MSRA 체결… 삼성중공업도 연내 인증 추진
日 미쓰비시·스미토모 등 구축함·항모 정비 도맡고, 필리핀 수빅만은 남중국해 긴급 수리 허브로
한국 거제에 위치한 한화오션 조선소. 사진=한화오션이미지 확대보기
한국 거제에 위치한 한화오션 조선소. 사진=한화오션

미국 해군의 최정예 주력 구축함인 알레이 버크급 USS 벤폴드(Benfold)함이 지난 7월 남중국해에서 발생한 원인 미상의 전력 차단(블랙아웃)으로 나흘간 표류하다 필리핀 수빅만 아길라 조선소로 긴급 예인되어 단 열흘 만에 완벽한 수리를 마치고 작전에 복귀했다.

이 사건은 자국 내 조선업 기반 붕괴로 만성적인 정비 지연을 겪고 있는 미국이, 한국·일본·필리핀 등 아시아 동맹국들의 선진 조선 인프라를 활용해 인도-태평양 전진 배치 함정들의 상시 전투 준비 태세를 유지하는 유연한 MRO(유지·보수·정비)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9월 6일(현지시각) 홍콩 영자 일간지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보도에 따르면, 미 해군은 중국과의 전략적 해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워싱턴 본토와의 물리적 거리를 극복하고 유사시 함정 회전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아시아 핵심 동맹국 야드에 대한 MRO 외주 계약을 전면 확대하고 있다.

미국 법령률은 주요 전투함의 신조 건조를 자국 내 조선소로 엄격히 제한하고 있지만, 해외 전진 배치 함정의 정비나 일정 요건을 갖춘 미 본토 모항 함정의 수리는 외국 조선소 위탁이 가능하도록 법적 유연성을 허용하고 있다.

워싱턴 소재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최신 보고서에서 "인도-태평양의 잠재적 분쟁 지역과 최대한 가까운 전진 거점에서 더 많은 함정을 신속히 수리·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는 것은, 전시를 포함한 미 해군의 장기 작전 지속 능력을 뒷받침하는 핵심 열쇠"라고 분석했다.

세계 선박 건조 점유율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며 자국 해군력을 폭발적으로 팽창시키고 있는 중국에 맞서, 세계 2·3위 조선 강국인 한국과 일본, 그리고 남중국해와 말라카 해협의 지정학적 길목을 쥔 필리핀과 싱가포르의 가치가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일본] 요코스카·사세보 거점… 미쓰비시·스미토모 등 핵심 전투함·항모 정비 전담


미 해군은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 기지에 미 함정수리시설 및 일본지역정비센터(SRF-JRMC) 본부를 두고, 나가사키현 사세보와 싱가포르 창이에 분견대를 배치해 직영 정비망을 가동해 왔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미 해군 함정수리협약(MSRA) 자격을 민간 중공업사로 넓히며 외주 역량을 극대화하고 있다.
미쓰비시중공업(MHI)은 최대 27만 톤급 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요코하마 조선소는 2019년 미 해군 구축함(USS 밀리어스) 수리를 수주하며 민간 외주의 물꼬를 텄고, 지난해에는 풀러급 원정 이동 기지함인 USS 미구엘 키스의 정기 오버홀 계약을 따냈다.

스미토모중공업은 요코스카를 중심으로 제7함대의 핵심 핵추진 항공모함과 육군 상륙정 정비를 지원하고 있다.

사세보중공업 &JMU(재팬마린유나이티드)은 신조 건조를 중단하고 수리 전용 야드로 전환한 사세보중공업은 미 해군과 도크를 공유하며, JMU 마이즈루 조선소는 구축함 USS 피츠제럴드의 복구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

[한국] '필리 조선소 인수' 기점 폭발적 확장… 보급선 넘어 3사 체제 구축


한국은 일본과 달리 미군 직영 수리창이 부재하지만, 압도적인 건조·수리 엔지니어링 속도를 바탕으로 군수지원선 MRO 분야에서 미국의 핵심 파트너로 급부상했다.

2024년 7월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이 미국 펜실베이니아 필리 조선소 인수 직후 미 해군으로부터 MSRA 인증을 획득하며 포문을 열었다.

한화오션은 거제조선소에서 한국 최초의 미 해군 MRO 프로젝트인 탄약 보급함 'USNS 월리 시라'의 정비를 성공적으로 마친 데 이어 제7함대 급유함 'USNS 유콘'의 정비까지 도맡았다.

HD현대중공업 역시 미국 최대 군용 조선소 헌팅턴 잉걸스와의 협력을 기반으로 울산 미포만 부두에서 탄약지원함 'USNS 앨런 셰퍼드'의 중정비를 완수했다.

확장세는 중견 조선소로도 이어졌다.

HJ중공업은 올해 1월 부산 영도조선소에서 4만 톤급 군수지원함 'USNS 아멜리아 이어하트'의 중기 수리 계약을 체결하며 한국 내 세 번째 MSRA 자격을 획득했다.

SK오션플랜트는 430m 규모의 초대형 플로팅 도크를 보유한 SK오션플랜트는 2월 공식 계약을 체결했다.

한국 '빅3'의 마지막 주자인 삼성중공업 역시 연내 MSRA 인증 완료를 목표로 심사를 진행하고 있어, 국내 주요 대형 야드 전체가 미 해군 지원 체계로 편입될 전망이다.

[필리핀·싱가포르·인도] 남중국해 수빅만 부활 및 말라카·인도양 거점화


지정학적 초크포인트에 위치한 동남아와 인도 역시 촘촘한 정비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

필리핀 수빅만은 자체 조선 기술은 부족하지만, 남중국해 바로 앞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살려, 과거 한진중공업 필리핀(HHIC-Phil) 야드였던 '아길라 수빅 조선소'를 미국계 사모펀드 세르베루스가 인수했다. 현재 미 방산업체 V2X(구 벡트러스)가 500m 길이 부두를 운영하며 남중국해에서 손상된 함정의 응급 복구 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말라카 해협을 지키는 싱가포르에서는 국영 방산기업 ST 엔지니어링 마린과 아시아 최고 깊이(14m) 도크를 보유한 시트리움(Seatrium)이 군수해상수송사령부 함정 정비를 전담하고 있다.

인도는 '인도-태평양 전략' 강화에 따라 마자곤 독, 라르센앤투브로(L&T), 코친 조선소 등 3곳이 잇달아 MSRA를 획득하며 인도양 작전 해역의 군수지원 거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아시아 동맹국 조선소를 아우르는 미 해군의 MRO 네트워크 구축은, 향후 ‘중국의 해군력 팽창과 대만해협·남중국해 위기 고조 속에서 손상된 미 함정을 본토로 회항시키지 않고 작전 반경 내에서 즉각 수리·복귀시키는 전략적 회복력(Resilience)의 핵심 근간’이자 ‘인도-태평양 동맹국들의 조선·방산 밸류체인을 안보 동맹과 일체화하는 다자간 해양 억제력의 중대한 분수령’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신경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shincm@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