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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유조선 품귀…장거리 원유수송 ‘운임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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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유조선 품귀…장거리 원유수송 ‘운임 벽’

美→아시아 운송비 배럴당 26달러 추가…VLCC 하루 수익 120만달러 넘어서
지난 2019년 7월 11일(현지시각) 싱가포르 주롱섬 인근 해상에 정박한 힌렁의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푸퉈산’.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2019년 7월 11일(현지시각) 싱가포르 주롱섬 인근 해상에 정박한 힌렁의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푸퉈산’. 사진=로이터

전 세계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 부족이 심화하면서 치솟은 해상운임이 장거리 원유 거래 자체의 채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미국에서 아시아까지 원유를 운송하는 비용이 배럴당 26달러(약 3만6100원)에 달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빌릴 수 있는 초대형 유조선을 거의 찾기 어려워지면서 정유사들이 먼 지역의 원유 대신 가까운 공급처로 눈을 돌리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전 세계 유조선 부족으로 원유 운송비가 급등하면서 일부 장거리 원유 거래가 경제성을 잃기 시작했으며 국제 원유 흐름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고 20일(현지시각) 보도했다.

미국 휴스턴에서 아시아로 원유 200만배럴을 운송할 경우 현재 운송비는 배럴당 약 26달러(약 3만6100원), 한 차례 운송에 약 5200만달러(약 722억원)에 달한다.

배럴당 운송비만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가격의 약 4분의 1에 해당한다. 전쟁 전에는 운송비가 원유 전체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았다.

◇페르시아만~중국 VLCC 하루 120만달러

블룸버그에 따르면 유조선 부족은 업계의 대표적인 항로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페르시아만에서 중국으로 원유 약 200만배럴을 실어 나르는 VLCC의 하루 수익은 120만달러(약 16억6700만원)를 넘어섰다.

불과 며칠 전 100만달러(약 13억8900만원)를 처음 넘어선 데 이어 다시 상승한 것이다.

트라피구라그룹의 사드 라힘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원유를 운송하는 비용이 이 정도까지 높아진 적이 없다”며 “운임이 원유 가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물류 자체가 중요한 문제가 됐다”고 지적했다.

높은 운임은 유조선 업체에는 막대한 수익을 안기고 있다.

세계 주요 유조선 관련 상장사의 시가총액은 이번 주 사상 최대인 약 700억달러(약 97조2300억원)까지 상승했다.

반면 정유사와 원유 트레이더 입장에서는 운송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장거리 원유를 들여와 휘발유나 경유 등 석유제품으로 정제해도 수익을 내기 어려워진다.

이에 따라 원유 수요 자체가 강하더라도 장거리 화물의 구매를 포기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아시아 원유 물량 이미 감소

운임 상승은 실제 원유 이동 경로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에너지 분석업체 보텍사의 선박추적 자료에 따르면 최근 몇 주 동안 미국에서 아시아로 향하는 원유 물량은 감소했다. 같은 기간 운송비는 약 세 배로 뛰었다.

일본의 한 정유사는 최근 자국 정제시설에 일반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알래스카산 원유를 구매했다.

블룸버그가 인용한 소식통들은 항해거리가 상대적으로 짧다는 점이 구매 결정에 영향을 줬다고 전했다.

이는 원유의 품질이나 가격뿐 아니라 운송거리가 원유 구매 결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아시아 정유사들이 중동산 공급 차질을 보충하기 위해 미국과 남미 등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원유를 조달해온 흐름도 비싼 운임 때문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유럽선 가까운 원유 쟁탈전

유럽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번 주 브렌트유 선물가격은 한때 배럴당 110달러(약 15만3000원)에 근접했지만 유럽 현물시장의 기준인 데이티드 브렌트 가격은 배럴당 131달러(약 18만2000원)를 넘어섰다.

정유사들이 운송거리가 짧은 원유 확보에 몰리면서 현물가격이 선물가격보다 크게 뛰었다.

유럽 정유사들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다음 달 장기계약 고객들에게 원유 물량을 배정하지 않으면서 중동산 원유를 대체할 공급처도 찾아야 하는 상황이다.

반대로 통상 중국까지 수천㎞를 이동하는 앙골라산 원유는 판매가 부진하다.

에너지 분석업체 케플러의 수미트 리톨리아 모델링 담당 선임매니저는 “현재와 같은 운임 수준이 장기간 지속되면 높은 비용 때문에 원유의 지역간 가격차를 이용한 거래가 막히고 가장 비싼 장거리 원유에 대한 수요도 줄어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VLCC 없자 더 작은 배 두 척씩 투입

초대형 유조선 부족은 중소형 유조선 시장까지 번지고 있다.

블룸버그가 접촉한 선박중개업자와 업계 관계자들은 특정 지역과 시점에서는 임대할 수 있는 VLCC가 사실상 없을 정도로 공급이 빠듯하다고 전했다.

아시아 정유사들은 미국산 원유 일부를 기존 VLCC 대신 약 70만배럴을 실을 수 있는 아프라막스급 유조선으로 운송하고 있다.

브라질 등 대서양 연안에서 원유를 실을 때도 200만배럴을 운송할 수 있는 VLCC 한 척 대신 100만배럴급 수에즈막스 두 척을 투입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수요가 작은 선박으로 옮겨가면서 이들 선박의 운임도 급등했다.

수에즈막스급 유조선의 하루 평균 수익은 30만달러(약 4억1700만원)를 넘어섰다. 통상 전쟁지역을 드나드는 선박에서나 볼 수 있던 수준이다.

◇호르무즈 환적·아프리카 우회에 선박 묶여

유조선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은 미국·이란 전쟁 이후 바뀐 원유 수송 방식이다.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셔틀 유조선들이 오만 인근에서 원유를 다른 선박으로 옮겨 싣는 방식이 확대되면서 한 척의 유조선이 하나의 화물 운송에 묶이는 시간이 길어졌다.

다른 유조선들은 지중해에서 원유를 싣기 위해 아프리카 대륙을 수천㎞씩 우회하고 있다.

중동산 공급 감소를 메우기 위해 아시아 정유사들이 미국 등 미주 지역에서 장거리 원유를 조달한 것도 선박의 항해기간을 늘렸다.

이런 요인이 겹치면서 선박 숫자가 실제로 크게 줄지 않더라도 시장에서 즉시 사용할 수 있는 유조선은 빠르게 감소했다.

블룸버그는 여기에 전쟁 이전부터 시작된 한국 해운업계 거물의 대규모 초대형 유조선 투자가 운임 상승에 영향을 미쳤다고 전했다.

◇운임 급등이 원유 교역지도까지 바꾸나

유조선 시장의 최대 관심은 현재의 높은 운임이 얼마나 오래 유지될지라는 지적이다.

유럽 경유 선물가격은 배럴당 200달러(약 27만8000원)에 근접해 있어 정유사들은 높은 운임을 감수해서라도 원유를 확보할 필요가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운송비가 계속 오르면 어느 시점부터는 장거리 원유 자체가 경쟁력을 잃을 수 있다.

보텍사의 자비에 탕 선임 시장분석가는 과거 운임이 원유의 최종 인도가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원유시장에서 훨씬 중요한 요소가 됐으며 최종 구매자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국제 원유 거래에서는 원유 가격과 품질이 구매 결정의 핵심이었다면 현재는 운송거리와 확보할 수 있는 선박의 존재 자체가 거래 성사 여부를 좌우하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초대형 유조선 부족이 장기화하면 중동산 공급을 미국·남미·아프리카산 원유로 대체해온 글로벌 원유 교역 구조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