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하마스 기습 이후 처음 치러진 이스라엘 총선은 한 시대의 정산서였다. 유권자들은 기록적인 숫자로 투표장에 나왔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투표율은 77.7%로 1999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분노와 피로, 그리고 변화에 대한 갈망이 동시에 투표함으로 쏟아진 셈이다.
결과는 역설적이다. 주요 3개 방송사 출구조사에서 리쿠드는 24~25석으로 제1당을 지켰고, 가디 아이젠코트의 야샤르는 21~23석으로 2위, 나프탈리 베네트의 베야하드는 12~14석으로 예측됐다. 의원내각제에서 중요한 것은 블록의 산술이다. 3개 방송사 모두 아이젠코트 블록이 52석, 네타냐후 진영이 50석으로 2석 앞선다고 봤고, 나머지 18석은 어느 블록에도 속하지 않은 아랍계 정당 몫이었다. 이스라엘민주주의연구소의 요하난 플레스너 소장은 이를 연정이 68석에서 약 50석으로 추락한 중대한 패배로 평가하면서도, 아이젠코트가 뚜렷한 승자로 떠오른 것은 아니라고 진단했다.
벤야민 네타냐후는 이스라엘 현대사 그 자체다. 1949년 텔아비브에서 태어나 특수부대 사예렛 마트칼에서 복무했고, 1976년 엔테베 작전에서 형 요나탄을 잃은 경험은 그의 안보관을 평생 지배했다. 미국 MIT에서 수학한 뒤 유엔 대사를 거쳐 1996년 최연소 총리에 올랐고, 이후 통산 재임 기간 최장 기록을 세웠다. 그의 정치는 '미스터 시큐리티'라는 브랜드,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에 대한 일관된 회의, 그리고 극우·초정통파와의 실용적 동맹으로 요약된다.
대항마 아이젠코트는 네타냐후와 정반대의 궤적을 걸어왔다. 1960년 티베리아스에서 모로코 이민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에일라트에서 자랐다. 엘리트 가문 출신의 네타냐후와 달리, 그는 이스라엘 주변부 '미즈라히' 서민층의 정서를 체현한다. 1978년 골라니 여단에 입대해 여단장, 총리 군사비서관, 북부사령관을 거쳐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제21대 참모총장을 지냈다. 북부사령관 시절 제시한, 적대 세력의 거점 지역에 압도적 화력을 투사한다는 이른바 '다히야 독트린'은 그가 결코 비둘기파가 아님을 보여준다.
정계 입문은 2022년 베니 간츠의 국민통합당을 통해서였다. 10월 7일 이후 전시내각에 참여했으나, 그해 겨울 아들 갈을 가자 전선에서 잃었다. 개인적 비극은 그를 네타냐후 정부의 책임을 묻는 가장 도덕적 권위 있는 목소리로 만들었다. 이후 독자 노선을 택해 창당한 야샤르는 모든 주요 여론조사에서 최대 야당으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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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념은 중도우파 안보 매파에 가깝다. 사법부 독립 수호, 10·7 국가조사위원회 설치, 초정통파 징집 확대를 내세우되 안보에서는 양보하지 않는다. 그의 승리는 이스라엘에 긴장된 대외관계를 재설정하고 국내적으로 새 노선을 그릴 기회가 되겠지만, 그 자신은 안보 문제에서 강경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공언했다. 선거 직후 그는 출구조사 결과가 시온주의 다수와 시민 다수가 네타냐후와 ‘10월 7일 정부'를 완전히 불신한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앞으로의 경로는 셋이다. 첫째, 아랍 정당의 외부 지지를 받는 아이젠코트 주도 소수정부다. 정통성 논란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한 길이다. 둘째, 리쿠드 일부와 중도 진영이 손잡는 '네타냐후 없는 대연정'이다. 리쿠드 내부의 후계 구도가 움직여야 가능하다. 셋째, 협상 결렬에 따른 재선거다. 이 경우 과도정부의 수장으로 남는 네타냐후가 시간을 버는 최대 수혜자가 된다.
이번 선거가 확인한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 유권자 다수는 네타냐후 연정에 등을 돌렸다. 그러나 대안 세력은 아직 과반의 문을 열 열쇠를 쥐지 못했다. 리쿠드는 제1당을 지켰고, 그 사실이 네타냐후를 버티게 할 것이다. 군복을 벗은 장군이 노회한 정치 9단을 넘어설 수 있을지, 그 답은 투표함이 아니라 앞으로 몇 주간의 협상 테이블에서 나올 것이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