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받는 천상부자]⑤ 임상옥
[글로벌이코노믹=김종길 기자] 논개나 황진이처럼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천한 것들’의 이야기니 당연히 그랬을만한 시대였다. 하지만 성리학적 가르침만이 진실이었던 그 신분사회가 동요하고 인간의 가치와 경제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 발아하던 시대에 뛰어난 감각으로 부를 거머쥐었고 이를 사회에 돌려준 인물이다.당시 조선의 무역은 일본 상인을 상대하는 동래 왜관과 여진족과 담비 가죽 등을 거래하던 회령과 경성, 중국 국경 책문후시를 통한 의주 지방에서 대부분 이뤄졌다. 그 중 의주의 최고 상인이 임상옥이다. 가진 돈을 모두 싸들고 한양으로 올라와 당시 부친상을 당했던 세도가 박종경을 쌀 1700석에 해당하는 5000냥짜리 어음을 끊어 찾아갔다. 당대의 세도가 박종경이 “남대문으로 하루에 몇 사람이나 출입하는지 알겠나? 장안의 군권과 치안을 맡은 총융사인 나이지만 도무지 모르겠네.”라고 질문하자 바로 답한다. “두 명입니다.” “뭐라고?” “하루에 남대문으로 몇 천명이 출입하든 대감께 이(利)가 될 사람과 해(害)를 끼칠 사람 둘이 있을 뿐입니다. 이도 해도 안 되는 사람은 쓸모가 없으니 셀 필요가 없지요.” 박종경이 감탄하며 무릎을 쳤고 임상옥에게 의주 상인 다섯 명이 10년간 대중국 인삼무역을 독점할 수 있는 권리를 내줬다. 무역대금은 박종경이 대기로 한 대표적 정경유착이었고 그때부터 임상옥은 돈을 갈퀴로 긁었다.
당시 조정에 비축된 은자 총액이 42만냥이었는데 임상옥을 위시한 의주상인들이 주무른 돈이 연간 700만냥이었다고 한다. 연간 나라에 내는 세금만 쌀 1만3000석, 돈으로는 4만냥이었다. 자신의 인삼을 비싸다며 보이코트하는 청국 상인들 앞에서 가져온 인삼을 모조리 불질러 더욱 비싸게 판 일화로 유명하다. 그가 사귀었던 박종경이 별로 질이 좋지 않았던 인물인데다 그가 권세를 잃자 재빨리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가문에 줄을 대 정경유착을 이어갔으니 후대들의 평이 마냥 좋을리만은 없다. 하지만 그 시대에는 정경유착이 없었다면 부자는 될 수 있어도 엄청난 부자는 되기 어려웠다. 더구나 그는 그렇게 번 돈을 사회를 위해 썼다.
가포(稼圃) 임상옥은 정조 20년인 1796년부터 사업을 시작한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商道) 출간 전까지는 아는 사람이 드물었지만 그의 가게에서 일한 회계 담당자만 70명이 넘었을 만큼 당대의 거상(巨商)이었다. 기록은 거의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임상옥 같은 비천한 상인을 귀성부사로 임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변사들의 의견이 단 한 줄 나오고 구한말 사학자 문일평이 남긴 세 장 반 짜리 평전만이 유일한 기록이다.
정조 3년인 177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농업생산력이 급증하고 민간 상업이 활성화되던 시기였다. 이 시대에 신흥 상인을 대표해 30세에 이미 거부로 성장했다. 임상옥이 무역상으로서의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고자 힘쓰고 있을 때 조선의 상단은 박주명 대방이 이끄는 '송상'과 홍득구 대방이 이끄는 '만상'이 대표적 상단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 이후에 임상옥이 대방이 되어 만상을 이끌게 됨으로서 한국 상단을 대표하게 되었다.
순조 때인 1810년 이조판서 박종경의 배경을 이용해 인삼무역 독점권을 확보했고 1821년 변무사를 수행해 청나라에 갔을 때는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동맹을 교묘하게 깨뜨리고 인삼을 원가의 수십 배에 팔아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을 수재민 등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사용했다. 모든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등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그는 사람과 신용을 중요하게 여긴 상인이었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며,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고, 따라서 신용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자산"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를 거상으로 만든 것은 홍삼이다. 중국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붉은 색을 좋아한다. 수삼은 보관이 용이하지 못하여 건삼으로만 유통되던 조선의 인삼이 붉은색을 띄며 약성도 좋은 홍삼으로 들어오자 중국인들은 이에 열광한다. 1821년 청나라 상인들의 불매동맹을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에 이문을 남겨 막대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가난한 자와 수재민을 구휼해 그 공으로 1832년 곽산군수, 1835년 구성부사로 발탁되었고 이후 양반 관료들의 견제로 인해 관직에서 내려와 빈민구제와 술과 시를 벗삼아 안빈낙도하며 여생을 보냈다.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고 사람은 바르기가 저울과 같다’는 유언을 남겼다. ‘장사란 이문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함’이라는 멋진 말도 했다. 물론 이 말은 역관이 되려는 꿈을 접고 그 밑으로 들어갔던 의주 만상 홍득주가 가포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준 교훈이다.
잔속에 관을 만들어 그 관 높이까지 술을 채우면 새지 않지만 관보다 높게 채우면 관속과 술의 압력이 같아져서 술이 흘러내려 잔에서 술이 없어지는 계영배를 항상 곁에 두고 과욕을 경계하고 또 경계했다. 그가 위대한 상인인 이유는 쌓은 富의 액수가 아니라 그 節制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