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보류 20세기 최대 공사, 현대건설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

글로벌이코노믹

보류 20세기 최대 공사, 현대건설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

나관중의 삼국지(三國志)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조조와 유비가 만나서 누가 중원의 진정한 영웅인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다.

이 대목에서 조조는 중원의 영웅은 조조 자신과 유비라고 말한다. 유비는 이 말을 듣고 조조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고 천둥에 놀라 겁 먹은 것처럼 바닥에 엎드려 겁쟁이로 위장해 조조를 속인다.

조조는 이때 "가슴에 큰 뜻을 품고 좋은 꾀를 갖고 있으며 우주의 기틀을 만들고 천지의 뜻을 삼키는 자라야 영웅이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우리 한국사에서 조조가 말했던 영웅에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으로 평가되는 인물이 고(故) 정주영 명예회장(이하 정 회장)이다.

▲현대건설이시공한주베일산업항./사진=현대건설제공이미지 확대보기
▲현대건설이시공한주베일산업항./사진=현대건설제공

정 회장은 중동 진출을 걱정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동은 1년 내내 비가 오지 않으므로 부지런히 일해 공사 기간을 단축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더우니까 잠을 자고, 공사는 야간에 진행하면 됩니다. 공사할 때는 모래로 콘크리트 시멘트를 만드는데, 사막이 근처에 있으니 흔한 것이 모래이고 물은 유조선을 건조해 비어있는 탱크에 가득 실어 보내고 복귀할 때 석유를 채워 오면 됩니다."

정 회장의 이런 긍정적 사고는 현대그룹의 중동 진출 성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5년 7월. 정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주베일에 엄청난 공사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사우디 정부는 사우디 동부 유전지대에 있는 주베일에 산업항을 세워 산출되는 원유를 수송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현대건설은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내는 데 성공했는데 공사 가격은 9억 3114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4500억원)였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20세기 최대의 공사였고 공사 가격은 당시 한국 1년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처음 이 공사에 입찰할 수 있는 자격은 당시 세계적인 건설회사 중 10개 회사에만 돌아갔다. 그런데 초청을 받은 업체가 9개였기 때문에 운 좋게도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이 자리를 얼른 차지한 것이 정 회장이었다.

정 회장은 주베일 공사를 반드시 따내야 했다. 공사 금액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공사를 통해 기술을 배워야 했기 때문이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해양구조물 시공기술이 있어야 했는데 국내 건설사들은 당시 해양구조물 시공기술이 없었다.

주베일 산업항 건설의 특징은 육상과 해상 토목, 건축, 전기, 설비 부문공사와 함께 30만 톤 유조선 4척이 동시 접안할 수 있는 해상 유조선터미널까지 건설해야 했다는 점이다.

해상 유조선터미널을 건설하려면 구조물 제작, 수송, 하역, 설치까지 모두 해내야 한다. 이 공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면 현대건설의 실력은 크게 올라간다. 정 회장은 바로 이 점을 노렸다.

▲주베일산업항공사현장을방문한정주영회장(사진중앙)과당시현대건설에서근무했던이명박전대통령(오른편)의모습./사진=현대건설제공이미지 확대보기
▲주베일산업항공사현장을방문한정주영회장(사진중앙)과당시현대건설에서근무했던이명박전대통령(오른편)의모습./사진=현대건설제공


결국 현대건설은 주베일 산업항 건설공사를 따냈다. 조건 없이 공사기간을 8개월 단축시키겠다는 제의가 결정적인 승리 원인이었다.

하지만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쉽지 않았다. 공사를 위해서는 '자켓'이라는 철 구조물이 필요했다. 자켓의 무게는 550톤, 높이는 36미터로 거의 10층 빌딩과 맞먹는 크기였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당시 한국 돈으로 약 5억원이 필요했다.

건설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력과 건설자재를 적절한 기간에 송출(물품 등을 전달)하는 것이다.

자켓과 같은 기자재는 울산 현대조선소에서 만들어 수송했다. 태풍권인 필리핀 주변 해역을 지나 몬순(계절풍)이 부는 인도양을 항해해 걸프만까지 가야했다.

그러던 중 정 회장은 공사기간 단축을 위해 중대 결단을 내렸다. 공사에 들어가는 철구조물 전체를 울산에서 제작한 다음 바닷길을 통해 수송하는 것이다. 악천후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바닷길로 12만 톤이나 되는 기자재를 바지선(화물 운반용으로 쓰이는 바닥이 평평한 배)에 싣고 가서 시공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이 수송을 위해 19회 항해를 해야 했다. 만일 바지선이 전복되거나 충돌 사고가 나면 큰 타격을 보게 될 것이었다.

주변에서 보험 가입을 권했지만 정 회장은 가입 하지 않았다. 정 회장은 보험 대신 해난 사고가 나더라도 자켓이 바다 위에 떠 있도록 만들라고 지시했다. 결국 항해가 시작됐고 7차 항해까지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다만 8차 항해에서 대만 국적 선박과 충돌해 자켓 가운데 한 개의 파이프가 망가지는 일이 있었고 태풍으로 인해 바지선 1척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대만 해안에 밀려 나가 있는 것을 끌고 왔다.

이런 수송작전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힘든 일이었지만 정 회장을 더욱 괴롭힌 것은 사우디 공사 발주처와 감독기관이 사사건건 의심의 눈초리로 정 회장과 현대건설을 쳐다 본 것이었다. 그들은 현대건설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정 회장은 결국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였다.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경제적 효과는 상당했다. 1975년 중동에 진출한 이후 천신만고(千辛萬苦)를 겪으며 현대건설은 1979년까지 51억 64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현대건설이 1977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 라스알가르 항만, 그해 6월 쿠웨이트 슈아이바 항만, 1978년 1월 두바이 발전소 공사까지 중동 지역의 대형 공사를 계속 따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주베일 산업항 공사의 성공이 있었다.

/글로벌이코노믹 곽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