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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반도체 몰락시켰던 미국, K-반도체에도 같은 전략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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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반도체 몰락시켰던 미국, K-반도체에도 같은 전략 쓰나

보조금 신청시 제출해는 기업데이터, 40여년 전 美전략과 유사
미국 정부에 가격결정권 뺏긴 日기업, K-반도체에 주도권 내줘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지난 2021년 4월12일(현지시간)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열린 반도체 공급망 복원에 관한 최고경영자(CEO) 화상 회의에 참석해 실리콘 웨이퍼를 들고 있다.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지난 2021년 4월12일(현지시간) 백악관 루즈벨트룸에서 열린 반도체 공급망 복원에 관한 최고경영자(CEO) 화상 회의에 참석해 실리콘 웨이퍼를 들고 있다. 사진=뉴시스
미·중 간 반도체 패권경쟁이 심화되면서 K-반도체의 위상도 흔들리고 있다. 중국 정부가 미국 마이크론에 대한 제재조치를 현실화하면서 미국 정부도 중국 기업들에 대한 블랙리스트 등재를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K-반도체가 새우등이 터지는 상황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문제는 K-반도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다. 미 상무부는 지난해 하반기 반도체법을 제정한 후 지난 2월말 반도체법 가드레일 및 세부규정을 통해 K-반도체 기업들에게 다양한 자료를 요구해왔다. 미 정부가 지원하는 보조금을 받으려면 기업의 영업비밀에 해당되는 다양한 데이터를 미 정부에 제공하라는 게 핵심이다.
특히 업계 일각에서는 미 상무부의 반도체법이 과거 일본 반도체산업을 몰락시켰던 미 정부의 행보와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다. 반도체 기업의 데이터를 확보해 가격결정권을 확보하는 방식이 과거 일본 반도체기업들에게 적용됐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자국의 반도체 공급망 확보 및 패권경쟁을 위해 K-반도체 산업을 뿌리부터 흔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28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미 상무부는 지난 2월말 반도체법 가드레일 및 세부규정을 통해 보조금 신청기업들이 미국 정부에 기업의 관련 재무정보부터 제품·생산 관련 데이터 등 다양한 정보들을 제출해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미 상무부가 제시한 사례를 살펴보면 △제품단위당 연도별 가격 △제품의 원가정보 △부지·건설·장비·관리비용·인프라개선비용 △인건비 △판매관리비 △연구개발비 △생산시설의 수율 정보 등이 포함됐다. 사실상 반도체기업들의 영업기밀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사안들에 대해 제출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이다.

이는 과거 미국 정부가 1986년 일본 정부와 맺었던 미·일 반도체협정과 유사하다. 당시 미국은 일본 기업들로부터 광범위한 규모의 재무정보를 제출받은 바 있다. 일본 기업들이 반도체를 원가 이하로 판매하는 이른바 '덤핑' 행위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미 정부는 일본 반도체기업들로부터 받은 제조원가 자료를 통해 오히려 가격통제에 나섰다. 이른바 '공정시장가격(FMV)'이란 것을 정해 해당 가격 아래로는 거래를 못하도록 제재한 것이다.

해당 조치로 인해 가격결정권을 상실하게 된 일본 반도체기업들은 결국 경쟁업체들어었던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에 시장을 내주게 됐다. 일본 반도체기업들이 미국 정부로 인해 시장에서 요구하는 가격과는 동떨어진 가격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반대로 낮은 가격에 판매가 가능했던 삼성전자와 마이크론이 급격하게 성장하게 된 것이다.
국내 반도체업계는 이런 사례를 근거로 미국이 반도체 공급망 확보 및 중국과의 기술패권 경쟁에서 앞질러 나가기 위해 K-반도체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반응이다. 미 상무부의 반도체법 가드레일 및 세부규정에서 제시한 대로 다양한 데이터를 제공하게 될 경우 향후 미 정부의 가격제한 정책에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가 용인에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한 것처럼 미국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받지 않으면 될 일이라는 반응도 있다. 미 정부에 보조금 신청을 하지 않으면 데이터 제공의무도 없어지는 만큼 문제될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당장 K-반도체 기업들이 미 상무부의 반도체법 규정에 따른 보조금 신청을 하지 않겠다고 할 경우 미 정부는 K-반도체가 중국과 손을 잡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미·중 간 패권경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어설픈 중립정책은 오히려 양쪽의 의심을 살 수 있는 상황인 셈이다.

게다가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기업들 및 연구소, 대학들이 연합해 '국가반도체기술센터(NSTC)를 설립했다. NSTC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결국 미 상무부에 반도체법 관련 보조금 신청을 할 수밖에 없다. NSTC에서 제외될 경우 국제표준과 동떨어진 제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및 반도체 전문가들은 이런 이유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가 미 정부의 반도체법 관련 규정에 대해 완화 및 보완을 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반도체 관련 대학교수는 "지난 한미정상회담 과정에서 반도체법 등을 충분히 논의했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의제에도 포함되지 못했다"면서 "반도체산업의 주도권을 놓고 미·중 등 정부차원의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서종열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seojy78@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