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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창립②] 현암, '사업보국' 하나로 앞을 향해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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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 창립②] 현암, '사업보국' 하나로 앞을 향해 달리다

1952년 10월 7일 부산에서 한국화약주식회사 창립
인천화약공장 복구를 시작으로 초안폭약 생산 성공
아시아서 일본에 이어 2번째로 다이너마이트 제조
현암 김종희 회장(오른쪽). 사진=한화이미지 확대보기
현암 김종희 회장(오른쪽). 사진=한화
지난 1952년 10월 9일. 고(故) 현암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 회장이 한국화약주식회사(현 한화)를 설립하고 대표 자리에 오른 날이다. 한국화약은 부산 중국 대창동 1가 41번지에 있는 2층 가옥을 본사로 삼고 자본금 5억원으로 시작됐다. 당시 현암 비롯해 유삼렬, 김덕성, 민영만 등 총 7인의 발기인으로 발족했다.

회사 설립 이후 그가 먼저 나선 것은 인천화약공장 복구 작업이었다. 일본에서 수입하던 화약에 의존하기보다는 국내 생산을 통해 자국 화약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함이다. 당시 인천화약공장은 초화공실부터 교하, 날화 등 각 공실에는 잡초가 우거졌고 남아있던 설비 또한 무용지물에 가까웠다.

현암은 우선 인천화약공장 설계도면 찾기에 나섰다. 현암은 수소문 끝에 도쿄대 도서관에서 인천화약공장 설계도 복사본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노력을 인정받아 1955년 6월 10일 한국화약에 조선유지 인천공장을 불하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고 9월 1일 제1차 공장 복구 작업을 시작해 그해 12월 24일 보일러 화입식을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복구 작업을 완료했다.

현암은 인천화약공장 복구 작업 이후 이듬해인 1956년 4월 국산 초안폭약 생산에도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이너마이트 국산화에도 뛰어들었다. 현암은 더욱 강력한 전천후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화약 국산화로 가는 길이라 보고 여기에 사운을 걸다시피 했다.
현암은 다이너마이트 개발 성공을 위해 인재 확보,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총 3차에 걸친 복구계획의 진행과 함께 화약의 제조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연희전문 화학과를 나온 신현기 등 전문 기술진을 발굴했다. 이런 노력을 바탕으로 한국화약은 1958년 6월 다이너마이트 시험 생산을 성공리에 수행했다.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다이너마이트를 생산하는 국가가 된 것이다. 또 이는 해방 13년 만에 이뤄낸 쾌거였다. 현암이 '한국의 노벨', '다이너마이트 김'이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이후 현암은 인천공장 3차 복구의 최종 공사인 글리세린 정제 공장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였고 글리세린 공장이 준공되면서 생산 원가를 크게 낮추는 데 성공했다. 3차에 걸친 복구공사가 완료된 시점에서 인천공장은 연간 다이너마이트 280t, 초안폭약 780t, 공업 뇌관 1000만개, 전기 뇌관 100만개 등을 생산해 낼 수 있는 국제 규모의 대시설 용량을 갖추게 됐다. 이후 미국과 연간 400t의 화약 공급 계약 체결 등을 통해 국산 화약 제품에 대한 경쟁력을 끌어올렸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지가 많은 국토에 도로를 놓기 위해서는 화약이 필수적이었다. 그만큼 화약 공급은 경부선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정도의 중대안 사안이었다. 당시 한국화약은 총 1만6000t에 달하는 화약을 생산해 현장에 공급했다. 만일 한국화약의 안정적인 화약 공급이 없었더라면 경부고속도로가 2년 만에 개통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김정희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h132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