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야구 몰라요.” 그가 남긴 말처럼 야구는 알 수 없고 삶도 그러하다. 알 수 없어서 사람들은 오늘의 야구를 맘껏 즐긴다. 승리에 기뻐하고 패배에 아파한다. 오늘의 예측이 빗나가고 기대에 어긋나도 알 수 없는 경기는 내일 다시 열리는 것이어서 사람들은 환호하고 탄식하며 야구를 즐긴다. 사람들에게 야구는, 날마다 똑같이 반복되어도 즐거운 무엇이다. 니체가 오늘날 이곳에 부활한다면 영원회귀의 적절한 비유를 야구에서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매일 계속 같은 방식으로 끝없이 사람들을 살아 있게 만드는 야구의 위대한 신체성에 찬사를 보낼 것이 틀림없다. 사람은 죽어 사라져도 야구는 불멸한다. 야구 안에서 던지고 치고 달리는 선수들의 모든 행위는 역사가 된다. 찬란한 기록을 쌓아올린 소수는 위버멘쉬와 마찬가지다. 우울의 어둠에서 허우적대는 이들에게 그들이 선사하는 것은 곧 복음이다. 그들은 야구라는 전쟁터에서 자기를 초극한 자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서 전설이 된다. 야구도 삶도 알 수 없긴 매한가지지만 사람들은 저녁마다 야구를 얘기하며 잠시 삶을 잊는다. 삶의 고통과 허무에서 찰나의 해방을 맞는다. 현대인들에게 야구는 매일 저녁 윤회하는 디오니소스의 축제다.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 '일급살인'에서 헨리 영은 배고픈 동생을 먹이기 위해 우체국에서 5달러를 훔친 죄로 알카트래즈에 갇힌다. 10년이 넘는 과도한 형량을 인정할 수 없었던 그의 유일한 선택은 어린 동생을 돌보기 위한 탈옥. 동료의 밀고로 영은 한 점의 빛도 새어들지 않고 몸조차 편히 누일 수 없는 비좁은 지하 독방에 벌거벗긴 채 3년간 갇히게 된다. 추위와 굶주림에 허덕이며 끝이 보이지 않는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디기 위한 그 만의 방법은 예전에 TV로 보았던 야구 경기들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떠올리는 것이었다. 헨리 영에게 야구의 기억은 자신의 삶에서 영원히 반복되어도 좋은 행복의 총합이었다. 끝없이 되새김질해도 녹아 없어지지 않는 에너지의 덩어리였다. 삶은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의 원천이었다.
TV 채널이 적었던 시절, 야구 해설은 하일성이었고, 하일성의 해설은 곧 야구였다. 그의 목소리가 더해질 때 버짐처럼 잔디밭 곳곳이 허옇게 패여 허름한 야구장 화면도 견딜 수 있는 구수한 것이 되었다. 그의 음성은 야구에 생기를 불어넣고 사람들을 중계 화면 앞으로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었다. 야구 안에서 그는 행복해 했고 사람들도 그의 해설을 좋아했다. 행정가에서 돌아온 그의 해설은 메이저리그 생중계 이후 높아진 팬들의 눈높이에 미치지 못했다. 마이크를 내려놓은 그는 야구 밖에서 불운하고 불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통스러운 순간마다 자신이 사랑했던 야구의 기억들을 꺼내어 꺼져가는 행복의 불씨를 되살릴 수는 없었을 것인가. 사람들은 그의 부음에 안타까워했다. 한 순간에 사람을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돈의 무서움과 수많은 지인들에 둘러싸여 있어도 경제적 궁핍을 해결할 수 없었던 돈의 차가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씁쓸해 했다.
이승 너머의 삶이 가능한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쓰는 말에 그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다. 그곳에도 멋진 야구장들이 있어 못다 한 해설 신명나게 하시길, 올해 한국시리즈도 재미있게 보시길. 그의 명복을 빈다.
오종호 (주)터칭마이크 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