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람들은 다가올 재앙을 예상 못했을 수 있다. 인류세를 사는 우리도 생존 위협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인류와 지구 생물종의 공존의 무대에 서있다. 그런데 갑자기 인류세 식단을 외치는 배우가 등장했는데, 과연 이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잠깐의 카메오 출연에 그칠까? 아니면 주연 역할을 해낼까? 연출가는 이 역할의 중요성을 인지할까? 관객은 열렬히 호응할까, 아니면 시큰둥할까? 아무리 훌륭한 인류세 식단이라도 사람이 실천하지 않고 외면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 식단의 실천은 서구인의 경우 육류위주의 식습관 때문에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연출가, 배우, 관객의 입장에서 살펴보자. 연출가는 인류세 식단의 중요성과 긴급성을 관객에게 선언하고 알려야 한다. 유엔의 세계보건기구가 2019년 세계 보건에 대한 위협 10가지를 발표한 것처럼 말이다. 배우는 맡은 역할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래야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배우는 정책을 만들어 사람들을 이끄는 그룹이다. 정책에 이론을 제공하는 학자부터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위정자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관객은 무대의 감동을 삶에서 실천하고 전파하는 사람들이다. 과거 우리나라에 쌀이 부족해 혼·분식을 정책으로 장려했을 때, 사람들은 '잘 살아보세'를 외치며 적극적으로 실천했다. 그들이 바로 관객이다.
그런데 인류세 식단의 실천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글로벌 문제이면서 로컬하게 풀어야 하는 세계경제처럼, 전 세계의 이익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각국의 손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많은 나라, 특히 선진국이 손익계산에 따라 이를 실천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럴 경우 이 식단은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그래도 희망은 남아있다. 유일한 희망은 바로 관객 스스로의 실천이다. 국제법 때문에 실천하는 것도 아니고, 각국 정부의 규제 때문에 실천하는 것도 아니다. 관객 스스로 마음에 새겨진 윤리적 마인드에 따라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객의 실천은 각자의 내면에 새겨진 무대의 감동 때문이다. 이 내면화된 감동이 바로 전 인류와 지구를 향한 음식윤리적 마인드이다. 음식윤리가 주장하는 가장 작지만 근본적인 요구가 바로 인류와 지구의 건강한 공존이기 때문이다.
김석신 가톨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