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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진단] 12· 12 사태와 경제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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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박사 진단] 12· 12 사태와 경제 쿠데타

오미크론 경제봉쇄 우려가 뉴욕증시와 암호화폐 그리고 국채금리, 국제유가 환율을 흔들고 있는 가운데 홍남기 부총리가 새해 경제운영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
오미크론 경제봉쇄 우려가 뉴욕증시와 암호화폐 그리고 국채금리, 국제유가 환율을 흔들고 있는 가운데 홍남기 부총리가 새해 경제운영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미국 뉴욕증시가 요동치고 있다. 나스닥 다우지수의 지수선물이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 비트코인과 도지코인등 암호화폐도 동반 급락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 소속 조 맨신 의원의 반대로 바이든 예산안이 결렬 위기를 맞고 있는데다 중국 경기가 급속하락하고 또 마이크로 쇼크가 급확산되고 있는 데에 따른 뉴욕증시의 급락으로 보인다. 지수 선물의 하락은 정규장 뉴욕증시에서 나스닥 다우지수의 하락요인이 된다. 이스라엘이 미국을 여행금지대상에 포함시키고 바이든이 마이크론과 관련해 긴급 특별 연설을 하기로 한 것도 악재가 되고 있다. 오미크론 경제봉쇄가 그야말로 비상이다.

아시아 증시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오미크론의 확산과 중국 경기둔화 우려에 동반 하락했다. 중국 증시는 기준금리 성격인 대출우대금리(LPR) 인하에도 1% 이상 하락했다. 상하이종합지수는 전거래일 대비 38.76포인트(1.07%) 내린 3,593.60에, 선전종합증시는 44.74포인트(1.77%) 하락한 2,478.41에 장을 마쳤다. 이날 중국 인민은행은 웹사이트를 통해 1년물 LPR을 3.80%로 공표했다. 인민은행의 LPR 조정에도 경기 우려가 이어지면서 증시가 하방 압력을 받았다. 금링틴하호 경기침체 이슈가 부상했다, 도쿄증권거래소에서는 2% 넘게 급락했다. 닛케이225지수는 전장보다 607.87포인트(2.13%) 내린 27,937.81에 거래를 마쳤다. 이 지수가 28,000선 밑으로 떨어진 것은 약 2주 만에 처음이다. 도쿄증시 1부에 상장한 종목 주가를 반영한 토픽스 지수는 전장 대비 43.14포인트(2.17%) 떨어진 1,941.33에 마감했다. 코로나19 새 변이종인 오미크론의 급속한 확산으로 인해 투자 심리는 더욱 위축됐다. 유럽 각국이 국경의 문을 닫기 시작한 가운데, 네덜란드와 독일도 속속 봉쇄 조처를 강화하면서 시장의 경계감을 강화했다. 대만 증시는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의 빠른 확산세에 대한 우려로 하락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는 오미크론 감염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영국발 입국 규제를 강화하는 등의 조치에 나섰다.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은 19일(현지시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오미크론에 대해 매우 분명한 한 가지는 그것의 놀라운 확산 능력과 전염력이고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겨울이 깊어감에 따라 앞으로 힘든 몇 주 또는 몇 달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주가가 떨어질 때면 해마다 연말이면 12.12 사태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꼭 42년 전인 1979년. 연말을 맞아 세모 분위가가 흥청이던 그해 12월12일 전두환ㆍ노태우 등 이른바 하나회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도 없이 불법으로 체포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군이 서로 싸워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 까지 체포하여 그로 하여금 대통령에게 설득하도록 한다. 마침내 대통령 최규하는 12월13일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했다.

이 사건으로 신군부 세력은 제5공화국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됐다. 유병현ㆍ황영시ㆍ김복동ㆍ유학성ㆍ박준병 등도 군의 요직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실시하여 국가 권력을 탈취한다. 그 다음날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다. 우리 역사의 큰 변곡점이었던 이른 바 12.12 사태는 1979년 12월12일 한 밤중에 벌어졌다. 그때 집권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몇 달 전 세상을 떴다.

세월이 흘러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난 1989년 12월12일 이번에는 경제계에서 12.12사태가 터졌다. 12.12 군부 쿠데타 10주년이기도했던 그날 노태우 정부는 이른바 증시안정화 대책 이란 것을 발표했다.

장소는 서울 남대문에 있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 이규성 재무부장관이 기자회견을 했다. 이규성 장관의 증시안정화 대책에는 ▲한국은행 발권력 동원 통화증발 ▲투신사에 대한 은행의 자금 무제한 공급 ▲ 투신의 주식매입 ▲시가발행 할인율 확대 등의 슈퍼 메가톤급 증시 부양조치가 담겨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은행 금고를 활짝 열어 증시가 안정될 때까지 주식매입자금을 무제한 지원하는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면 한국은행 발권력을 동원해 통화량을 무한정 찍어내겠다는 것이었다.

이 발표 이후 은행들은 실제로 2조7000억 원을 3개 투신사에 주식 매수자금으로 빌려주었다. 당시 2조 7000억원은 그 때 우리나라 모든 상장사 들의 시가총액 합계액의 2.8%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투신사들은 그 돈으로 주식을 닥치는 대로 매입하기 시작했다.

투신사들이 주식을 대량으로 사 모으자 주가는 바로 오르기 시작했다. 정부의 증시안정화대책이 효력을 보는 듯했다. 12.12대책 이후 사흘 동안 코스피가 100포인트 올랐다. 약발은 그때까지였다. 영업일 기준으로 나흘째 되는 날부터 오히려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부양책을 틈타 오히려 손을 털고 빠져나간 투자자들이 많았다.

이규성 재무장관은 여기에 또 4조원 규모의 ‘증권시장 안정기금’을 추가로 투입했으나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증시의 둑을 지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코스피는 그로부터 2년 반 동안 계속 추락했다. 1992년 8월에는 역사적 저점인 456포인트까지 내려앉았다. 은행에서 돈을빌려 주식을 산 투신사들은 모두 파산했다.

대다수의 경제전문가들은 경제의 원리와 시장메커니즘에 반하는 무리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헌법을 유린한 하나회의 12.12 군사쿠데타와 너무도 닮았다.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지금도 당시의 증시안정화 대책을 ‘증권판 12.12사태’라고 부르고 있다.

무리한 정책의 대가는 실로 컸다. 그 부작용은 단군 이래 최대의 환란이라는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원인으로까지 작용했다. 정부가 잘못 개입할 때 나라가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교훈이다.

요즘도 우리 정치권에서는 해괴한 경제정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말이 수레를 끄는 것이 아니라 수레가 말을 끌고 간다는 소득주도성장에서 부터 아파트와 집값을 거꾸로 폭등시킨 수십 차례의 부동산 안정화 대책, 종부세 세 세금폭탄 그리고 나라곳간 털어 마구 퍼주는 현금살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황당한 정책들이 이어지고 있다. 12.12 경제 쿠데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시장실패는 정부의 개입으로 수정할 수 있다. 정부실패는 과연 누가 수습해 줄 것인가, 경제쿠데타로 인한 손실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

오미크론 경재봉쇄 우려가 뉴욕증시와 암호화폐 그리고 국채금리, 국제유가 환율을 흔들고 있는 가운데 홍남기 부총리가 새해 경제운영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
오미크론 경재봉쇄 우려가 뉴욕증시와 암호화폐 그리고 국채금리, 국제유가 환율을 흔들고 있는 가운데 홍남기 부총리가 새해 경제운영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미국 뉴욕증시가 요동치고 있다. 나스닥 다우지수의 지수선물이 큰 폭으로 떨어지고 있다. 비트코인과 도지코인등 암호화폐도 동반 급락하고 있다. 미국 민주당 소속 조 맨신 의원의 반대로 바이든 예산안이 결렬 위기를 맞고 있는데다 중국 경기가 급속하락하고 또 마이크로 쇼크가 급확산되고 있는 데에 따른 뉴욕증시의 급락으로 보인다. 지수 선물의 하락은 정규장 뉴욕증시에서 나스닥 다우지수의 하락요인이 된다. 이스라엘이 미국을 여행금지대상에 포함시키고 바이든이 마이크론과 관련해 긴급 특별 연설을 하기로 한 것도 악재가 되고 있다. 오미크론 경제봉쇄가 그야말로 비상이다.

아시아 증시도 큰 폭으로 떨어졌다.오미크론의 확산과 중국 경기둔화 우려에 동반 하락했다. 중국 증시는 기준금리 성격인 대출우대금리(LPR) 인하에도 1% 이상 하락했다. 상하이종합지수는 전거래일 대비 38.76포인트(1.07%) 내린 3,593.60에, 선전종합증시는 44.74포인트(1.77%) 하락한 2,478.41에 장을 마쳤다. 이날 중국 인민은행은 웹사이트를 통해 1년물 LPR을 3.80%로 공표했다. 인민은행의 LPR 조정에도 경기 우려가 이어지면서 증시가 하방 압력을 받았다. 금링틴하호 경기침체 이슈가 부상했다, 도쿄증권거래소에서는 2% 넘게 급락했다. 닛케이225지수는 전장보다 607.87포인트(2.13%) 내린 27,937.81에 거래를 마쳤다. 이 지수가 28,000선 밑으로 떨어진 것은 약 2주 만에 처음이다. 도쿄증시 1부에 상장한 종목 주가를 반영한 토픽스 지수는 전장 대비 43.14포인트(2.17%) 떨어진 1,941.33에 마감했다. 코로나19 새 변이종인 오미크론의 급속한 확산으로 인해 투자 심리는 더욱 위축됐다. 유럽 각국이 국경의 문을 닫기 시작한 가운데, 네덜란드와 독일도 속속 봉쇄 조처를 강화하면서 시장의 경계감을 강화했다. 대만 증시는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의 빠른 확산세에 대한 우려로 하락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주요 국가는 오미크론 감염 사례가 급증하고 있는 영국발 입국 규제를 강화하는 등의 조치에 나섰다. 앤서니 파우치 미국 국립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은 19일(현지시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오미크론에 대해 매우 분명한 한 가지는 그것의 놀라운 확산 능력과 전염력이고 여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며 "겨울이 깊어감에 따라 앞으로 힘든 몇 주 또는 몇 달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렇게 주가가 떨어질 때면 해마다 연말이면 12.12 사태를 생각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꼭 42년 전인 1979년. 연말을 맞아 세모 분위가가 흥청이던 그해 12월12일 전두환ㆍ노태우 등 이른바 하나회 소속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대통령 재가도 없이 불법으로 체포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우리 군이 서로 싸워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신군부 세력은 국방장관 노재현 까지 체포하여 그로 하여금 대통령에게 설득하도록 한다. 마침내 대통령 최규하는 12월13일 정승화의 연행을 재가했다.

이 사건으로 신군부 세력은 제5공화국의 핵심세력으로 등장한다.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이희성 중장, 수도경비사령관에 노태우 소장, 특전사령관에 정호용 소장이 임명됐다. 유병현ㆍ황영시ㆍ김복동ㆍ유학성ㆍ박준병 등도 군의 요직을 차지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실시하여 국가 권력을 탈취한다. 그 다음날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다. 우리 역사의 큰 변곡점이었던 이른 바 12.12 사태는 1979년 12월12일 한 밤중에 벌어졌다. 그때 집권한 전두환과 노태우는 몇 달 전 세상을 떴다.

세월이 흘러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난 1989년 12월12일 이번에는 경제계에서 12.12사태가 터졌다. 12.12 군부 쿠데타 10주년이기도했던 그날 노태우 정부는 이른바 증시안정화 대책 이란 것을 발표했다.

장소는 서울 남대문에 있는 대한상공회의소 회의실. 이규성 재무부장관이 기자회견을 했다. 이규성 장관의 증시안정화 대책에는 ▲한국은행 발권력 동원 통화증발 ▲투신사에 대한 은행의 자금 무제한 공급 ▲ 투신의 주식매입 ▲시가발행 할인율 확대 등의 슈퍼 메가톤급 증시 부양조치가 담겨있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한국은행 금고를 활짝 열어 증시가 안정될 때까지 주식매입자금을 무제한 지원하는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면 한국은행 발권력을 동원해 통화량을 무한정 찍어내겠다는 것이었다.

이 발표 이후 은행들은 실제로 2조7000억 원을 3개 투신사에 주식 매수자금으로 빌려주었다. 당시 2조 7000억원은 그 때 우리나라 모든 상장사 들의 시가총액 합계액의 2.8%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투신사들은 그 돈으로 주식을 닥치는 대로 매입하기 시작했다.

투신사들이 주식을 대량으로 사 모으자 주가는 바로 오르기 시작했다. 정부의 증시안정화대책이 효력을 보는 듯했다. 12.12대책 이후 사흘 동안 코스피가 100포인트 올랐다. 약발은 그때까지였다. 영업일 기준으로 나흘째 되는 날부터 오히려 주가가 폭락하기 시작했다. 부양책을 틈타 오히려 손을 털고 빠져나간 투자자들이 많았다.

이규성 재무장관은 여기에 또 4조원 규모의 ‘증권시장 안정기금’을 추가로 투입했으나 이미 무너지기 시작한 증시의 둑을 지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코스피는 그로부터 2년 반 동안 계속 추락했다. 1992년 8월에는 역사적 저점인 456포인트까지 내려앉았다. 은행에서 돈을빌려 주식을 산 투신사들은 모두 파산했다.

대다수의 경제전문가들은 경제의 원리와 시장메커니즘에 반하는 무리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헌법을 유린한 하나회의 12.12 군사쿠데타와 너무도 닮았다. 여의도 증권가에서는 지금도 당시의 증시안정화 대책을 ‘증권판 12.12사태’라고 부르고 있다.

무리한 정책의 대가는 실로 컸다. 그 부작용은 단군 이래 최대의 환란이라는 1997년 IMF 외환위기의 원인으로까지 작용했다. 정부가 잘못 개입할 때 나라가 얼마나 망가질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교훈이다.

요즘도 우리 정치권에서는 해괴한 경제정책들이 쏟아지고 있다. 말이 수레를 끄는 것이 아니라 수레가 말을 끌고 간다는 소득주도성장에서 부터 아파트와 집값을 거꾸로 폭등시킨 수십 차례의 부동산 안정화 대책, 종부세 세 세금폭탄 그리고 나라곳간 털어 마구 퍼주는 현금살포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황당한 정책들이 이어지고 있다. 12.12 경제 쿠데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시장실패는 정부의 개입으로 수정할 수 있다. 정부실패는 과연 누가 수습해 줄 것인가, 경제쿠데타로 인한 손실은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경제학 박사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