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은 1974년 고(故) 이건희 회장이 사재까지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면서 사실상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 수출 중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과감한 투자와 기술 개발을 통해 1990년대부터는 수출 품목 가운데 1위를 놓치지 않는 국내 대표 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는 전체 수출 중 20%가 넘는 비중으로 한국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 속에서 대만, 유럽연합(EU), 일본 등 주요 국가들이 반도체 관련 산업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각국 정부는 반도체 산업 지원책을 앞다퉈 내놓고,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고 있다. 그야말로 반도체 대전(大戰)이 펼쳐지고 있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 속에서 올 3분기 삼성전자는 인텔에 1위 자리를 내줬고, SK하이닉스도 퀄컴에 밀려 4위를 기록했다.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에서는 대만의 TSMC가 선두를 달리고 삼성전자가 2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양사의 점유율 간극이 올 2분기 37.0%포인트에서 3분기에는 40.6%포인트로 더 벌어졌다. 중국 SMIC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산업의 경쟁 구도에서 ‘영원한 1위’도 없지만 2위 자리를 뺏기는 것도 순식간이다.
K-반도체가 더 걱정되는 이유는 미국, 중국, 대만, 일본 등 경쟁 국가의 공세가 점점 더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요 국가들의 반도체 키우기 전략은 이미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와 과학법‘ 제정을 통해 첨단 반도체 제조 역량을 강화하고 있다. 총 2800억달러(약 366조원)를 투입하기로 했고, 시설·장비 투자에 25%의 세액공제를 해주며 독려한다.
중국도 2025년 반도체 자급률 70%를 목표로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지원책을 실행하고 있다. 총 1조위안(약 187조원)을 투자해 미국의 공세에 맞서겠다는 전략이다. 대만은 첨단 공정 개발, 차세대 반도체 기술 연구, 장비·소재 국산화 등 정부와 기업의 협공을 통해 주도권 강화에 나서고 있다.
K칩스법의 핵심인 세액공제 확대에 대해서는 아직 관련 회의 일정도 잡지 못했다. 미국이 세액공제 25%를 내세워 글로벌 주요 기업들로부터 반도체 투자를 싹쓸이하는 동안 우리 정부는 공제율 8%를 고수하면서 남 좋은 일만 시키고 있는 꼴이 됐다.
이 뿐만이 아니다. 미국, 중국이 반도체 산업 육성에 적극 나서면서 가뜩이나 부족한 우리나라 반도체 인재들의 해외 이탈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되고 있다. 반도체 관련 석·박사 인력들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K-반도체의 위기는 곧 한국 경제의 위기다. 정부가 우물쭈물하는 동안 K-반도체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 반도체가 한국 경제의 근간이 되는 산업인 만큼 지금보다 몇 배 더 공을 들여야 한다. 남들이 하는 만큼만 해서는 1위 자리를 지킬 수 없다. 또 정부와 기업의 궁합이 잘 맞을 때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이 높아지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다.
김영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mosteve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