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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은행나무를 생각하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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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향기] 은행나무를 생각하는 아침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비가 내린다. 장마가 시작된 모양이다. 사나흘 두고 땡볕 아래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숨을 턱턱 막히게 하더니 새벽녘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요즘 날씨는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어느 지역엔 지독한 가뭄이 들기도 하고, 어느 지역엔 집중호우로 물난리를 겪기도 한다. 예측 불가의 기상이변으로 인해 기상청의 예보는 번번이 빗나가기 일쑤지만 피해를 줄이려면 장마 채비를 단단히 하는 수밖에 없다. 창가에 서서 우연에 가려진 먼 산을 우두망찰 바라보다가 문득 나무들은 이 덥고 습한 계절을 어떻게 견딜까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 한 그루 은행나무를 떠올렸다.

내가 사는 동네엔 서울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 어른이 계신다. 방학동 은행나무다. 이 칼럼을 통해 소개한 적도 있는 방학동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무려 885세나 된다. 1968년 서울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할 당시 나이가 830세였다. 서울시는 당시 44그루를 보호수로 처음 지정한 이후로 현재는 지정 보호수가 204그루로 늘었다. 좀 더 자세히 서울시 지정 보호수의 수종(樹種)을 살펴보면 느티나무 98그루, 은행나무 48그루, 회화나무 17그루, 향나무 13그루, 소나무 8그루, 기타 20그루로 총 16종 204그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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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방학동 은행나무는 단연 최고의 어르신 나무이다. 방학동의 은행나무는 지상 1.5m에서 4개의 큰 가지로 갈라지고, 다시 중상층부에서 여러 개의 가지로 갈라져 웅장한 수형을 이루고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지곤 한다. 특히 2013년에는 문화재적 가치도 인정되어 서울시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됐다.

수령이 885살이나 됐으니 884번의 사계절을 견디고 다시 봄을 지나 이 여름을 우리와 함께 건너가고 있을 것이다. 그 숱한 세월을 묵묵히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도 경이롭지만, 해마다 봄이면 연둣빛 새잎을 내고 한껏 푸르러졌다가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들기를 되풀이하면서 이 땅의 역사를 지켜보았다는 사실이다. 비바람 눈보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푸르름을 잃지 않는 그 은행나무를 보면, 백 년도 살지 못하면서 천 년이라도 살 것처럼 악다구니를 써대는 우리네 삶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흔히 사람들은 나무를 볼 때 그 쓰임새를 생각하거나 경제적 가치를 계산하느라 나무가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종종 망각하곤 한다. 분명한 것은 나무는 우리와 같이 생명을 지닌 존재임에도 자연에 맞서거나 그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철저히 순응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내리면 눈을 맞는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도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는다.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변덕을 부려도 탓하는 법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가장 적합하고 알맞은 생의 포즈로 자신의 할 일을 해내는 게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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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가장 오랜 세월을 묵묵히 겪어낸 방학동의 은행나무는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지혜를 나이테 속에 숨기고 오늘도 조용히 비를 맞고 서 있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하거나 삶이 늘어진 고무줄처럼 탄성을 잃었다 싶으면 나는 곧잘 은행나무를 찾아가곤 한다. 나무는 늘 말이 없지만,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탑처럼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를 탑돌이 하듯 몇 바퀴 돌고 나면 이내 모난 마음도 둥글어지고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곤 한다.

창 너머로 보이는 앞집 담장 아래 능소화가 몇 송이 떨어져 있다.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하던 어느 시인의 독백처럼 비가 온다고 하늘을 탓할 일은 아니다. 습기 많고 후텁지근한 장마의 계절이지만 묵묵히 비바람의 세월을 견디는 나무처럼 늘 푸른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비를 맞고 있을 방학동의 은행나무를 생각하는 아침, 내 몸에도 초록빛 피가 도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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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훈 사색의향기 문학기행 회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