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만은 몰락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 도모 등 반역 죄목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한성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 미국 선교사들이 구출시켰다. 미국 5년 동안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일본의 미국 침략 경고 등 외교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승만은 권력에 대한 집착과 독선적인 성격, 능력과 권위주의로 인해, 과거 동지라도 뜻이 맞지 않으면 정적이 되었다. 광복 이후, 여운형, 송진우, 장덕수, 김구 등에 대해 서북청년단이 가담한 암살 의혹이 있었지만, 오히려 친일세력의 충성심을 권력의 지렛대로 활용했다.
이승만은 언론의 비판을 허용하고, 지방자치제와 선거제 정착, 지주와 농민이 만족하는 농지개혁으로 민주주의 통치 이데올로기와 지지세력을 확보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통치기반을 확보했다. 문맹을 퇴치하고 유학을 장려한 것은 훗날 공업화에 엄청 도움이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후반부엔 탁월한 외교적 감각인 '벼랑 끝 전술'로, 2개 사단 규모의 미군 주둔, 한국군을 30개 사단 규모로 증원하며, 전력 현대화를 지원하는 내용의 ‘무기한(indefinitely)’ 유효하게 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지금까지도 큰 공적이다.
이승만은 냉전 구조에서 반공을 국시로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체제 토대와 한일 평화선 선포 등 국가 발전기초를 마련했다. 그러나 군주형으로 주변 간언과 조언자 없이 정치 기반을 잃었고, 시민의식으로 민주주의가 성장하면서 4·19 혁명과 자진하야, 망명지에서 서거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 후기 하급관리에서 동학 접주였던 아버지 이력으로 연좌제에 결려, 아버지가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장택상 총리와는 소작농과 조부 선산 등으로 악연이었다.
누구에게도 지기 싫어하던 가난한 수재였던 박정희는 대구사범과 교사, 만주 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 관동군 장교로 근무하던 중 일본 패망으로 졸지에 북경의 광복군에 편입되어 귀국한다. 다시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한국 군대에서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는 육영수 여사와 결혼 이후, 부산군수기지 사령관 시절, 작은 체구에 조각처럼 빚은 꼿꼿한 자세로 술을 마시며, 수심에 찬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1960년 민주당 집권 시기, 사상문제가 제기되면서 육사 8기 김종필, 윤필용, 이낙선 등의 장교들과 거사를 결정한다.
박정희는 야당과 언론, 전문가 비판에도 경부고속도로·서울 지하철 공사를 강행했다. 새마을 운동,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자주국방과 군 현대화는 물론, 박태준·정주영·이병철 회장을 앞세워, 철강·자동차·중화학·조선·전자·반도체산업 육성 등 공업화를 달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0월 유신 등 각종 논란으로 독재자의 면모를 보였지만, 월남전쟁으로 인한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를 막고, 북한을 넘어,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불세출 영웅이었지만, 3선 개헌과 유신헌법으로 장기 집권과 야당 지도자를 탄압하면서, 비극을 잉태시켰다.
역사적으로 국가위기상황에선 카리스마가 강한 지도자가 국운을 갈랐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의 폐허에서도 반공을 국시로 민주주의 기틀을 만들었다. 박정희는 “하면 된다” “잘살아 보세”라는 정신으로 5000년 가난을 물리치고, 국민에게 꿈을 주고, 산업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구한말과 36년 일제강점기 격동(激動) 세월은 모진 고통에서 다양한 생각과 처신으로 살았다. 그 시대 사람에 대해, 오늘의 사람들이 주관적 판단으로 평가하기는 그리 간단치 않다.
혹자는 ”박정희 모델은 부정돼야 할 모델”,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경제 발전은 되었을 것"이라지만,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자살률이 세계 1등이고, 출산율은 맨 꽁지다. 젊은이들이 행복하지 않아 미래를 꿈꾸지 못하고 병이 들어, 절망하는 나라가 되었다.
참지도자는 선심을 쓰듯, 함부로 국고를 풀거나, 괴담과 선동정치보다는, 정치·교육·연금·노동 개혁을 위한 국가 운영시스템을 구축함이 마땅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번 물난리 재난사태를 보면서, 행정·제도의 특혜와 규제를 개혁함에, 상식을 파괴하는 지도력을 보고 싶다.
임실근 (사)한국스마트유통물류연구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