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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가평 연인산의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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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향기] 가평 연인산의 야생화

백승훈 시인
백승훈 시인
“신록에는, 우리의 마음에 참다운 기쁨과 위안을 주는 이상한 힘이 있는 듯하다. 신록을 대하고 있으면, 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머리를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낸다.” -이양하의 수필 ‘신록예찬’ 일부

누구나 신록 예찬자가 되는 5월, 가평 연인산을 다녀왔다. 눈이 부시게 연노랑의 광채를 내는 신록의 절정,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는 이맘때 산과 들을 뒤덮은 초록은 온전히 영글지 않은 앳된 빛을 띤다. 그래서 유난히 맑고 산뜻하며 신선하여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신록의 절정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연인산을 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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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산(戀人山). 이보다 예쁜 산 이름이 있을까? 연인산은 1068m나 되는 높은 산이지만 예전에는 화전민들이 살던 이름 없는 산이었다. 북쪽에는 명지산이 있고, 남쪽으로는 칼봉산이 있는 연인산은 1999년 가평군이 아홉마지기마을에 전해 오던 ‘길수와 소정’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차용해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이란 뜻으로 연인산으로 이름을 고쳤다. 옛날 아홉마지기마을의 숯을 굽던 청년 길수와 참판댁 여종 소정이와의 안타까운 미완의 사랑 이야기가 서려 있는 연인산엔 봄이면 얼레지와 양지꽃이 군락을 이루며 피어나 장관을 이룬다. 특히 연인산엔 사람 키보다 큰 철쭉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빛깔이 화려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은 연분홍 철쭉이 활짝 피는 이맘때가 경관이 매우 수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른 아침 상봉역에서 경춘선을 타고 가평역에 도착, 다시 버스로 갈아타고 백둔리에서 하차하여 연인산 등산로 중 최단코스인 소망능선을 따라 산을 올랐다. 신록의 여린 잎 사이로 은빛 햇살이 쏟아지고 바람에 살랑대는 자잘한 나뭇잎들이 꽃만큼 눈부시다. 깊게 숨을 들이쉬면 저 신록의 초록 기운이 온몸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다. 산에 오지 않으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청정한 숲의 기운이 도시에서 지친 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폐교를 지나 산길로 들어서려는데 제비꼬리나비가 허공을 사뿐히 날아 흰 꽃 위에 앉는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고추나무꽃이다. 는쟁이냉이꽃도 피었고 펜션 앞 겹벚꽃도 만개하여 허공에 꽃잎을 뿌려댄다. 숲길로 접어드니 꽃빛은 사라지고 초록 일색이다. 초록은 살찌고 꽃빛은 야윈다는 ‘녹비홍수(綠肥紅瘦)’란 사자성어가 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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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월 봄 산엔 꽃들로 가득하다. 분홍 앵초, 노란 양지꽃, 얼레지, 병꽃, 피나물꽃, 노랑제비꽃, 철쭉, 족두리풀꽃, 홀아비바람꽃 등……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꽃들이 지친 발걸음을 끌어당긴다. 꽃 한 송이 발견하고 다가가 사진을 찍고 고개를 들면 또 저만치에 꽃이 보이고, 그 꽃을 보고 나면 또 저만치에 다른 꽃이 눈에 들어오곤 한다. 그래서 꽃을 보며 올라가는 게 산을 가장 쉽고 빠르게 오르는 방법이다. 나의 경험상으론 상당히 유효한 등산법이 아닌가 싶다. 못내 아쉬웠던 것은 얼레지꽃은 이미 절정이 지난 뒤라는 것과 철쭉은 아직 절정에 이르지 못한 것이었다. 굳이 시절 인연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꽃을 보러 다닐 때마다 가장 어려운 게 때를 맞추는 것이란 생각을 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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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에 홀린 탓일까. 하산길에 잠시 길을 잘못 들어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예정했던 버스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꽃을 보는 것도 버스를 타는 것도 때를 맞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론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타면 되겠지만 우리들의 시간은 유한하다는 사실이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초록이 다시 단풍 들기까지 자연은 때맞추어 자신의 색을 바꾼다. 사람들은 지구온난화 때문에 꽃이 때를 모르고 동시다발적으로 핀다고 타박을 하지만, 꽃은 환경 변화를 읽고 거기에 맞춰 꽃을 피운 것이고 보면 정작 때를 모르는 건 우리 인간이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