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이 짙어질수록 흰색 꽃이 자주 눈에 띄는 까닭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에는 많은 수목 종류들이 5, 6월 중에 꽃을 피우는데 이들 중 흰 꽃을 피우는 자생식물의 절반 이상이 흰색 꽃을 피운다고 한다. 이 시기는 사람들의 야외 활동이 활발해지는 시기인 데다 흰색 꽃을 피우는 수목 가운데 절반 이상이 사람 눈높이에 있거나 조금 높은 관목성 수목이라서 사람 눈에 잘 띈다.
무엇보다 흰색 꽃이 많은 이유는 꽃가루받이와 관련이 깊다. 곤충들에 의해 꽃가루받이를 해야 하는 식물의 꽃은 곤충을 유혹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흰색 꽃을 피우는 이유를 알려면 사람의 시각이 아닌 곤충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흰색 꽃은 사람 눈엔 잘 띌지 몰라도 곤충들은 불행히도 흰색 꽃을 인지하지 못하므로 색으로 유혹하기는 어렵다. 흰 꽃을 피우는 식물들은 꽃의 색을 만드는 데 적은 자원을 쓰는 대신 꿀이나 꽃가루, 향기를 만드는 데 더 힘을 써서 곤충들을 불러들이려는 전략으로 바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흰 꽃 중에 향기가 가장 좋은 꽃을 피우는 찔레나무는 우리나라 산과 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낙엽 활엽 떨기나무다. 한자어로는 야장미(野薔薇), 산장미(山薔薇), 도미(荼蘼·酴醾)다. 찔레나무라는 이름은 줄기와 가지에 가시가 있어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찔리기 때문에 붙여졌다. 국가표준식물 목록에는 찔레꽃이 추천 명으로 등재되어 있지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찔레나무와 찔레가 표준어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꽃인 데다 문학 작품이나 노래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져 찔레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 유년의 기억 속엔 친구들과 산과 들을 쏘다니며 주전부리로 찔레를 꺾어 먹던 추억이 남아 있다. 찔레는 찔레나무의 새로 돋아난 어린 가지나 줄기를 이르는 말인데, 먹음직한 찔레는 대개 나무 밑동에서 돋는다.
화려한 색의 장미에 비하면 흰색의 찔레꽃은 수수하고 단아한 멋을 지닌 꽃이다. 하지만 찔레꽃은 장미보다 더 진하고 감미로운 향기를 지녔다. 찔레꽃은 화려한 색이 아닌 달콤하면서도 그윽한 향기로 우리의 발길을 돌려세우는 꽃이다. 향기도 좋고 맛도 좋은 찔레꽃이 필 무렵은 공교롭게도 모내기 철과 겹친다. 그래서 한창 모내기를 해야 할 무렵에 드는 가뭄을 두고 ‘찔레꽃가뭄’이란 말이 생겨났다. 일 년 농사에서 가장 중요한 모내기를 해야 하는데 비는 오지 않고 주위를 돌아보면 찔레꽃만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농부들의 눈에 그 꽃이 곱게만 보이지는 않았을 테니 죄 없는 찔레꽃을 원망하다가 생겨난 말인 듯도 싶다.
‘찔레꽃 필 무렵에 비가 오면 개 턱에도 밥알이 붙게 된다’는 북한 속담이 있다. 모내기 철에 비가 와야 풍년이 든다는 뜻이다. 올해는 물난리를 걱정할 정도로 비가 자주 내리니 가뭄 걱정 없이 마음 편히 찔레꽃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달콤하면서도 그윽한 찔레꽃 향기에 맘껏 취해도 좋은 시절이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