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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지속가능한 몰입을 위한 일 경험 설계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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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칼럼] 지속가능한 몰입을 위한 일 경험 설계의 조건

이혜원 플랜비디자인 책임컨설턴트이미지 확대보기
이혜원 플랜비디자인 책임컨설턴트
업무 자동화와 협업 도구의 확산, 회의 시간 단축, 출퇴근 부담의 완화 등 최근 몇 년간의 변화는 많은 조직에서 ‘일 자체’의 양을 줄이는 방향으로 설계되어 왔다. 그러나 업무량이 감소했음에도 지속적인 피로와 탈진을 호소하는 구성원은 오히려 늘고 있다. 이는 단순한 과로가 아닌, 일을 경험하는 방식 자체에 구조적 문제가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Supriyadi 등(2025)이 수행한 디지털 피로 관련 문헌 연구에 따르면, 지속적인 디지털 도구 사용은 직원의 웰빙과 생산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과도한 디지털 참여는 정신적 탈진, 성과 저하, 스트레스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분석된다. 물리적 노동은 줄었지만 정보 과부하와 연결 압박, 실시간 반응을 강요하는 디지털 환경은 구성원의 인지적·정서적 피로를 가중하고 있다.

Gallup(2019)의 ‘직원 번아웃(Employee Burnout)’ 보고서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확인된다. 보고서는 직원 번아웃의 가장 큰 원인으로 근무시간이 아닌 ‘업무 경험의 질’을 지목하며, 업무를 어떻게 경험하느냐가 탈진 여부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피로의 실질적 원인은 단순히 업무량이 아니라 일의 맥락과 구성원의 심리적 자원 상태에 깊이 연관돼 있다.

실제로 구성원이 업무 기획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지시된 과업만 반복 수행하고, 성과의 기준과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상황이 지속될 경우 물리적 강도가 낮은 업무일지라도 심리적 에너지는 빠르게 소진된다. 업무가 단편적이고 상위 목적과의 연계가 설명되지 않을 때 구성원은 자신의 역할을 조직 내 ‘실행자’ 수준에 한정하며, 일에 대한 몰입도와 지속성, 만족감 모두 저하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구조는 단기적으로는 성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조직 정체성의 약화, 자존감 손상, 이탈률 증가로 이어진다. 독일의 문화사학자이자 번아웃 상담코치로 활동 중인 안나 카타리나 샤프너는 ‘지쳤지만 무너지지 않는 삶에 대하여’에서 “현대인의 탈진은 단순·과중한 업무가 아니라 ‘자기 존재의 부재’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사람은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이 거기 있다는 느낌이 없을 때 지친다”고 말한다. 이는 과업은 분명 존재하되 구성원이 그 안에서 주체로서 실재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조직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다.

조직은 종종 성과지표는 정교하게 설계하지만 그 성과를 만드는 구성원의 ‘일 경험’은 구조적으로 설계하지 않는다. 지속가능한 몰입과 심리적 에너지 회복을 위해서는 단순한 업무량 감축이 아니라 일의 맥락을 되살리는 조직적 개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조직과 리더는 다음 세 가지 관점에서 일 경험을 재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첫째, 기여의 연결을 구조화해야 한다. 구성원이 수행하는 과업이 조직의 목표, 고객 가치, 팀 성과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반복해 설명하고 공유해야 한다. 특히 반복되거나 나눌 수 있는 과업일수록 ‘이 일이 전체 그림 속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둘째, 역할의 명확성과 결정 권한의 범위를 재조정해야 한다. 일에 맥락이 결여되는 주요 원인은 기획-수행이 수직적으로 분리돼 구성원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리더는 구성원이 판단하고 주도할 수 있는 경계를명확히 설정하고, ‘이 부분은 당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신호를 조직적으로 줄 필요가 있다. 이는 구성원이 일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 즉 자율성과 주체감을 회복하게 만드는 핵심 요소다.

셋째, 성과에 대한 피드백은 결과 자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넘어야 한다. 구성원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제약을 극복하고 결과를 만들어 냈는지에 대한 피드백이 병행돼야 한다. 단순히 ‘잘했다’가 아니라 ‘이 일의 중요성과 당신의 기여가 왜 결정적이었는지’를 말이나 글로 알려주는 리더십은 구성원이 자기 효능감을 회복하고, 다음 일에 몰입할 수 있는 정서적 기반이 된다.

이 세 가지 요소가 작동할 때 구성원은 단지 과업을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의 의미와 가치를 구현하는 사람으로 연결된다. 그 연결감이야말로 오늘날 조직이 다시 설계해야 할 핵심 동력이며, 지속가능한 몰입의 시작점이다.

조직의 과제는 이제 ‘얼마나 더 시킬 것인가’가 아니라 ‘그 일이 어떻게 경험되고 해석되는가’를 설계하는 일로 전환되어야 한다. 단기 성과에 매몰되지 않고, 구성원이 자기 존재를 회복하며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도록 돕는 '일 경험 설계'야말로 지속가능한 성과와 리더십의 본질이 될 것이다.


이혜원 플랜비디자인 책임컨설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