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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나루의 아침] 조건부 파트너십의 경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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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나루의 아침] 조건부 파트너십의 경고음

외교와 정치의 교차점에서 본 한국의 리스크
육동윤 글로벌이코노믹 기자이미지 확대보기
육동윤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현대차 미국 배터리 공장 직원 구금 사태는 겉으로는 노사·법적 분쟁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정치와 외교가 얽힌 구조적 문제다. 한국 기업들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이후 미국 전기차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 핵심 파트너로 부상했다. 현대차와 기아는 수십억 달러를 투자해 조지아와 앨라배마에 대규모 공장을 건설 중이고, 미국 시장 점유율도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은 단순한 현지 법 집행을 넘어선다. 미국의 정책과 규제 환경 속에서 한국 기업들이 얼마나 취약한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다. 현지 생산, 현지 고용, 현지 조달이라는 조건을 충족해도 파트너십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얼마나 제한적인지 보여준다.

미국의 조건부 전략은 역사적으로 반복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미국의 참전은 무조건적 동맹이 아니었다. 진주만 공격 이후 태평양전쟁에 뛰어들었지만 루스벨트 행정부는 유럽 전선 개입을 늦추며 자국의 정치·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했다. 전후 복구를 위한 마셜플랜 역시 인도적 지원이 아니라 공산주의 확산을 막고 미국 중심의 경제 질서를 강화하려는 조건부 원조였다.

오늘날 IRA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현대차와 기아를 포함한 한국 기업들은 미국이 주도하는 글로벌 전기차 공급망의 핵심축으로 편입됐지만 그 관계는 어디까지나 조건부다. 보조금과 세제 혜택, 현지 규제, 인증 절차 등 어느 하나도 한국 측이 결정권을 갖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비대칭은 명확하다.
문제는 국내 정치가 이 복잡한 조건부 구조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세계 자동차 시장이 전동화 전환을 향해 급가속하는 가운데 한국 정부는 '속도'에 방점을 찍었다. IRA 법안이 통과되자 현대차와 기아의 대규모 투자를 서둘러 발표했고, 관세 리스크가 수면에서 요동치자 평정심을 잃었다.

속도전에 매몰된 전략은 중요한 질문을 피해 갔다. 미국의 규제 환경 변화에 대한 협상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기업의 투자 리스크를 정부가 어떤 방식으로 방어할 것인지, 그리고 한국 내 배터리·반도체·핵심 소재 산업의 공급망 주도권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대한 종합적 해법은 제시되지 않았다. 결국 현대차 사태는 가속은 하지만 브레이크를 설계하지 않은 전략의 한계를 드러냈다.

한국의 전기차 산업은 글로벌 공급망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만큼 외교적 리스크에도 취약하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유럽의 탄소 국경세 등 주요 시장의 정책 환경은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국내 정치는 이러한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정파적 대립과 단기적 이해관계에 갇혀 산업 전략은 실종 상태에 가깝다.

미국 의존도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중국 시장 대응 전략은 여전히 부재하고, 유럽의 환경 규제에 대한 제도적 준비도 부족해 보인다. 일본과 동남아 국가들과의 전기차 공급망 협력 역시 뚜렷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산업 전략을 국가 차원에서 조율하지 못하면, 현대차와 기아 같은 개별 기업들은 국가 단위 협상력이 필요한 문제를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교훈은 분명하다. 기업 차원의 현지화 전략만으로는 한계가 있고, 정부의 제도적 안전망과 외교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 강력한 협상력, 출중한 외교 전략이 절실하다. 전기차 시대의 경쟁은 반도체와 배터리,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국가적 산업 전략 없이는 리스크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육동윤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ydy33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