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민 대한중대재해예방협회장

대기업 본사 구매팀에서 나온 말에 박 대표는 당황했다. 직원 50명의 상업용 인테리어 전문업체를 15년째 운영해오며 현장 경험과 가성비로 승부해온 그에게 ESG는 부담스러운 용어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자료가 필요한가요?"
이에 구매팀 김 부장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윗선에서 ESG를 중시하라고 지시는 내려왔는데…명확한 평가 기준이나 인증서가 정해진 건 아니에요. 환경이나 안전 관련해서 뭔가 보여줄 수 있는 게 있으면…" 서류를 뒤적이던 그가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다른 협력사들도 비슷하게 어려워하고 있어요."
박 대표가 겪은 일은 더 이상 남의 얘기가 아니다. ESG는 이제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기업의 생존 조건이 되었다. 하지만 중소·벤처기업들에는 여전히 높은 장벽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최근 데이터 기반 ESG 실천으로 성과를 증명한 중소기업 사례들이 등장하면서 작은 기업도 ESG 거인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장벽 앞에 선 작은 기업들
ESG 경영이 기업 평가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으면서 대기업들은 발 빠르게 대응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러나 첨단 기술 기반 스타트업이나 소프트웨어 중소기업에는 ESG가 여전히 높은 벽으로 느껴진다. 생존에 급급한 신생 기업들에 ESG 경영은 사치처럼 여겨지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도 명확하지 않다.
산업안전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안전관리가 강화됐지만 이는 주로 제조업과 대기업을 염두에 둔 기준이다. 규모가 작은 기업들은 복잡한 규제 요구사항을 충족하기 어려워한다. 실제로 대기업과 발주처가 협력사 선정 시 ESG 이행 수준을 꼼꼼히 점검하는 상황에서 중소기업들은 이에 부응할 지표와 시스템 부족으로 진입장벽을 느끼고 있다.
스타트업들이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ESG 성과를 뒷받침할 데이터의 부재다. 투자나 사업 제휴 과정에서 ESG 성과 입증을 요구받아도 신생 기업일수록 축적된 실적이 없고, 측정 체계도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벤처투자사의 약 45%가 "스타트업의 ESG 성과 측정과 데이터 확보의 어려움"을 투자 결정의 제약 요소로 지목했다.
공신력 있는 ESG 인증 취득 역시 쉽지 않은 과제다. 전문가들은 ESG에서 중요한 요소로 '인증'을 꼽으며, FSC 인증이나 공정무역 인증처럼 신뢰할 수 있는 외부 인증이 기업 브랜드 신뢰도를 높인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현재 ESG 평가 지표들은 대기업 위주로 설계돼 있어 스타트업이 활용할 수 있는 적합한 표준이 부족한 실정이다.
바늘구멍을 뚫는 작은 기업들, 폐기물이 황금이 된 이야기
그러나 최근 알스퀘어의 사례는 중소·벤처·스타트업 기업도 실질적인 ESG 성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상업용 부동산 서비스와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알스퀘어는 적극적인 ESG 사례를 찾던 중, 폐기물 처리 과정에서 해답을 찾았다.
폐기물 처리 전문업체와 협력 인테리어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폐기물 수백 톤을 전량 재활용한 것이다.
폐합성수지 250여 톤은 고형연료(SRF)로, 폐목재 190톤은 바이오연료로, 폐콘크리트 190톤은 순환골재로 각각 변환했다. 그 결과 약 600톤의 탄소 배출을 줄였는데, 이는 나무 9만 그루가 1년간 흡수하는 탄소량과 맞먹는다. 기존 매립·소각 방식 대비 온실가스를 30% 이상 추가로 감축한 것이다. 폐기물 처리 비용도 평균 5% 절감돼 "환경과 비용 절감은 양립할 수 없다"는 기존 통념을 뒤집었다.
투명성이라는 무기
이러한 성과의 핵심은 데이터 기반 관리 시스템에 있다. 현장에서 폐기물이 발생하면 모바일 앱으로 수거를 요청하고, 허가 차량 배차부터 이동 경로 추적, 집하장 계량과 품목 분류까지 모든 과정이 디지털로 기록된다. 어떤 폐기물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처리됐는지 투명하게 관리함으로써 불법 투기나 처리 과정의 블랙박스를 없앤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2026년 예정된 수도권 생활폐기물 직매립 금지에 대한 선제적 대응 모델로도 주목받고 있다. 매년 수백만 톤의 폐기물을 배출하는 건설·인테리어 업계에서 폐기물을 순환자원으로 전환하는 이런 접근법은 업계 전체의 비용 부담과 규제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환경 분야뿐만 아니라 산업안전 영역에서도 스타트업들이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한 건축 전문 스타트업은 최근 권위 있는 건설안전관리평가에서 최고 등급을 획득했다. 이는 중대재해처벌법과 산업안전보건법을 기준으로 기업의 안전관리 체계를 종합 진단하는 평가로, 대형 발주처와 건설사들이 협력업체 선정 시 핵심 지표로 활용하는 공신력 있는 외부 평가다.
해당 기업은 평가에서 만점을 받아 실내 건축 공사업 부문 업계 상위 0.1% 수준의 안전 역량을 인정받았다. 업계 전체에서 최고 등급을 받는 기업이 1.2%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중소기업으로서는 이례적인 성취다. 안전보건 관리체계, 위험요인 관리, 안전투자, 종사자 의견 청취, 재해 예방, 안전교육 등 모든 항목에서 우수한 점수를 받았고, 최근 3년간 중대재해 발생 이력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린워싱을 넘어선 진정성
최근 ESG 경영 열풍 속에서 그린워싱(겉치레만 하는 환경주의)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진정성 있는 ESG 실천이 주목받는 이유는 보여주기식 마케팅이 아니라 데이터로 증명된 실제 성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 탄소 감축량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하고,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관리해 이해관계자들이 신뢰할 수 있는 결과를 도출하는 게 핵심이다.
특히 환경 성과와 비용 절감을 동시에 달성함으로써 ESG 투자의 경제적 실익을 증명한 점이 의미가 크다. 폐자원을 에너지화해 인근 공장에 스팀 열원을 공급하는 것은 지역 산업에 도움을 주면서도, 기업 입장에서는 폐기물 처리 비용을 낮추는 상생 효과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선순환 구조야말로 ESG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방향이다.
남은 과제는 더 많은 중소기업들이 ESG와 안전 경영을 실천할 수 있게 돕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전 사업장에 적용되고 있지만 여전히 소규모 사업장들은 안전관리 인력 부족, 전문성 부족, 비용 부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이에 대해 비교적 규모가 큰 기업이 영세 사업장의 안전보건 체계 구축을 상담·지원하고, 정부 제도 활용 노하우를 공유하는 대-중소 상생 협력 모델이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공공과 민간이 힘을 합쳐 스타트업의 ESG 경영 역량을 키우는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다행히 최근 금융권과 정부에서도 이러한 지원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일부 은행들은 스타트업 전담 ESG 컨설팅팀을 신설해 맞춤형 솔루션을 무료로 제공하고, 정부 산하 기관들도 스타트업 ESG 포럼을 개최해 우수 사례 확산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스타트업의 ESG 실천 사례들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을 증명한다. 거대한 ESG 거인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데이터라는 무기로 바늘구멍을 뚫어낸 작은 기업들이 오히려 산업 전반에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다. ESG 경영과 산업 안전은 이제 대기업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기업의 생존과 직결된 과제다.
정책 지원, 금융 인센티브, 전문 컨설팅을 통해 작은 기업들도 지속 가능 경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 공공과 민간이 협력해 스타트업과 중소기업들의 진정성 있는 ESG 실천을 지원하고 확산시키는 노력이 지속돼야 할 것이다.
거인과 맞서는 다윗은 혼자가 아니다. 데이터로 무장한 작은 기업들이 ESG라는 거인을 넘어뜨리며 시대를 열고 있다. 기업 규모와 상관없이 모든 기업이 ESG 경영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포용적 생태계, 그 꿈이 현실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