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목사님은 한국전쟁 중 포항고교 학도호국단장 시절, 공개총살형에서 혼자 살아남았다. 여고생(김순이 여사) 도움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나 강원도까지 끌려갔고, 부상으로 남하 중 잡혀, 국군 소대장 명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전쟁 후 적색분자 색출에도 한 사람도 지목하지 않았다.
자유당 독재 시절, 서울대 수학과 3학년을 휴학하고 고향에서 모교 교편을 잡던 중 기장 설립자셨던 김재준 목사의 포항 집회를 위해 강단을 제공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그의 설득으로 신앙이 개인 구원을 넘어 ‘수학도’의 사회적 책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굳혔다.
1960~1970년대 그는 한국신학대학과 연세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서남동 교수의 제안도 거절한 채 KSCC 총무로 기독교 청년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부산 미국문화원 학생과장을 거쳐 1972년 부산 YMCA 총무로 청년 시민운동을 이끌며 YMCA를 민주주의 거점으로 만들었다.
군사정권 시기, 그는 권력에 침묵하지 않고 억압과 불의에 맞서 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 나섰으며, 개인적 희생도 신앙적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삶은 신앙과 정치 현실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자, 종교인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모범적 모델이 되었다.
부산 중부교회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다. 시민 집회와 유인물 배포로 지역민의 민주 의식을 높였으며, 장애인 자활 지원, 양서조합 설립, 수련회·농활·영수증 모으기 운동 등으로 지역 청년들의 사회 참여와 의식을 고취했다. 설교는 현실을 향했고, 행동은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민중 신학적 관점은 그의 사상의 핵심이었다. 억압받는 이들의 시선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중부교회 청년회는 유신 시절에도 서울의 반정부 재야인사를 초청하여 강연회, 인권운동 사례 발표회, 구속자 석방 기도회 등을 이어갔다.
그의 삶은 개인적 안락보다 공동체 정의를 선택한 연속이었다. 부산 도시산업교회의 특수선교 활동과 재야 학생 민주화 운동, 노동계 민주화 인권운동을 접목하고 기독교 청년협의회(EYC)를 구성해 부산 엠네스티 운동, 영치금 보내기, 교도소 방문, 편지쓰기 운동 등을 전개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 당시 그는 수배와 과로로 고혈압 위기를 겪고 병원에 입원했다. 부림사건과 신민주연합 입당, 노무현·김광일 등 민주인사 공천 참여 등의 행동들은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기준이 되었으며, 그의 도덕적 태도는 동시대인과 후대세대에게 중요 귀감이 되었다.
1992년 3월 22일 그는 과로로 길거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문익환 목사는 추도사에서 “자신이 평생 원했던 일을 제자가 죽기까지 대신해 주었다”고 말씀했다. 그의 죽음은 부산지역 운동권과 청년들에게 큰 아쉬움으로 남았으나, 삶은 단절되지 않고 ‘민주화의 유산’으로 이어졌다.
필자에게 최성묵 목사는 1972년 대학-Y 초대 회장 시기부터 정신적 지주였다. 필자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설교집 편찬 권유와 은퇴 후 집 마련을 우창웅 지도교수와 박상도 선배에게 부탁한 정도였다. 지금도 목사님의 깊은 신념과 실천적 삶에 비해 부끄러운 마음을 다시 새긴다.
최성묵 목사는 설교집 편찬을 거절했지만, 그의 사상과 행동은 오늘날까지 민주주의와 정의 실현의 상징으로 남아, 신앙과 사회적 책임이 결합한 삶을 보여준다. 매년 이어지는 추모 행사에서 그는 권력과 불의 앞에서도 침묵하지 않고 공동체 정의를 실천한 본보기로 기억된다.
임실근 (사)한국스마트유통물류연구원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