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번스의 망령... 파월 점도표 기자회견과


번스는 1970년 2월 닉슨 대통령에 의해 연준 의장에 올랐다. 1978년 1월까지 8년간 연준 의장으로 재직했다. 1972년 재선을 눈앞에 둔 닉슨 대통령이 인플레이션 우려에도 금리 인하를 종용했다. 번스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다. 8%대인 미국 기준금리는 불과 1년 만에 4%대로 내렸다. 1973년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지자 미국 물가상승률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아 10%대로 올라섰다. 당황한 번스는 뒤늦게 기준금리를 13.6%까지 급격히 인상했다. 그 결과 1970년대 미국 경제는 경기 침체까지 겹친 전대미문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치달았다. 그 상황에서 번스는 또 한번 실책을 저지른다. 경제가 나빠지자 금리를 다시 내리라는 정치권 압박에 바로 굴복해 버렸다. 번스는 1년 만에 다시 기준금리를 5.24%로 끌어내린다.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겠다고 했지만 기대인플레만 잔뜩 부풀렸다. 결국 미국의 인플레율은 다시 10%대로 치솟았다. 미국의 잃어버린 20년은 번스의 정책 실패에 기인한다.
번스 의장은 1973년 10월 4차 중동전쟁이 터지면서 원윳값이 치솟자 물가지표를 바꾸었다. 석유와 에너지 관련 제품을 소비자물가지수(CPI)에서 뺀 것이다. 물가가 덜 오른 것처럼 보이도록 한 일종의 변칙이었다. 그때 배럴당 2.9달러였던 국제유가는 2~3개월 만에 4배가량 치솟았다. 번스는 한 술 더 떴다. 식품 가격이 급등하자 엘니뇨를 지목했다. 엘니뇨가 비료·사료 가격을 높였고, 이것이 돼지고기·쇠고기·닭고기 값을 뛰게 했다는 논리였다. 연준은 식품 가격도 CPI에서 뺐다. 식료품의 CPI 비중은 25%였다. 요즘 연준이 선호한다는 근원 물가는 번스가 금리 인하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미국 연준은 1913년 ‘연방준비제도설립법’ 제정에 따라 출범했다. 미국에서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은 그 이전 독립전쟁 때부터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알렉산더 해밀턴(초대 재무장관)은 신생국 미국이 유럽 강대국들과 맞서려면 중앙은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해밀턴의 구상은 1791년 미국은행(The Bank of the United States) 설립으로 실현됐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중앙은행이다. 최초의 미국 중앙은행은 오래가지 못했다.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미국은행의 소유·지배권이 소수의 민간 부자들에게 집중된 점을 들어 1811년 전격 폐쇄해버린 것이다.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비 조달의 필요성이 높아지자 1816년 두 번째 중앙은행을 설립한다.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 때 국립은행법을 제정했다. 국립은행법으로 중앙은행의 권한을 대폭 늘렸다. 이 두 번째 중앙은행은 1829년에 집권한 앤드루 잭슨 대통령 때 사라진다. 금융 재벌들의 중앙은행 독점이 국가 경제에 해가 된다면서 폐쇄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미국은행이라는 건국 초의 중앙은행 제도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1907년 10월 구리 투기 실패로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은행들이 파산하는 금융 공황이 터진다. JP모건이 은행장들을 조직해서 취약한 금융기관에 자금을 무제한 몰아주는 식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일개 자본가가 중앙은행의 기능 중 하나인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도 중앙은행을 설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당시의 금융 공황이 연준의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그 결과 1913년 12월 23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설립법이 제정됐다. 이 미국 연준법의 기본 정신은 중앙은행의 독립이다. 정치권은 물론 어떠한 세력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서 번스는 그 기본을 허물었다. 그 바람에 역대 최악의 연준 의장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무너뜨린 대가는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두 차례에 걸친 오일쇼크도 그 출발은 미국발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 스태그플레이션에서 벗어나는 데 20년 이상 걸렸다. 그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있다. 오늘날 미국 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37조 달러의 미국 국가부채도 바로 스태그플레이션 때문에 생겨났다.

최근 들어 아서 번스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연준을 압박하면서 아서 번스 때처럼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뉴욕증시의 가장 큰 손인 JP모건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제롬 파월이 추진하고 있는 연준의 금리 인하가 정치적 압력에 따른 것으로 비칠 경우 미국 금융시장과 달러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시장 상황이 이미 과열돼 있는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금리 인하에 나선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면 금리 인하가 오히려 주식·채권·달러 모두에 부정의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이 보고서는 경고한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금리 인하를 압박해왔다. 물가가 여전히 높은 상태에서 금리 인하 요구는 아서 번스 시절 닉슨 대통령과 닮아있다.
제롬 파월은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아서 번스의 우(愚)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왔다. 파월의 선택이 주목된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