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반도체 전쟁' 격화…글로벌 공급망 붕괴 위기
트럼프 "경제 선전포고"…금융 시장도 '블랙 프라이데이'
트럼프 "경제 선전포고"…금융 시장도 '블랙 프라이데이'

세계 반도체 공급망에 '빨간불'이 켜졌다. 디지타임스, 블룸버그통신 등 주요 외신들은 12일(현지시각) 중국발 '희토류 쇼크'가 덮치면서 네덜란드 ASML과 삼성전자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의 생산 차질이 현실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중국이 '첨단 산업의 쌀'인 희토류 수출을 통제하자, 미국이 100% 추가 관세로 맞불을 놓으면서 '반도체 전쟁'이 격화된 탓이다. 인공지능(AI) 시대의 핵심인 최첨단 반도체 공급망 붕괴 우려가 커지면서 관련 업계는 그야말로 좌불안석이다.
반도체 업계 덮친 '희토류 쇼크'
세계 반도체 업계는 즉각 타격을 받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만드는 네덜란드의 ASML 홀딩 NV는 이번 조치로 부품 수급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장비 선적이 수 주간 늦춰질 위기에 처했다. 세계적인 장비업체인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등도 비슷한 위기에 놓였다. ASML 측은 특히 중국산 희토류가 포함된 제품을 제3국으로 다시 수출할 때도 중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미국과 네덜란드 정부에 외교적 해결책 마련을 촉구하는 등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의 다른 반도체 기업들도 큰 혼란에 빠졌다. 한 주요 반도체 기업의 고위 관계자는 "가장 명백한 위험은 반도체 공급망에 필수적인 희토류 의존 자석의 가격이 치솟는 것"이라며 잠재적 파장에 대한 평가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또 다른 기업 관계자는 "우리 제품 가운데 중국산 희토류가 포함된 품목을 가려내는 작업에 들어갔다"면서 "중국의 허가 요건이 전체 공급망을 마비시킬 수 있다"고 큰 불안감을 드러냈다. 인텔, 삼성전자, 대만 TSMC 등 ASML 장비에 의존하는 세계 최고의 파운드리 업체들 역시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말을 아끼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군사 응용 기술에 쓸 수 있는 반도체 부품을 제한 대상으로 명시하며 이번 조치가 반도체와 AI 산업을 겨냥한 전략적 수출 통제임을 분명히 했다. 이 조치가 AI 열풍을 이끄는 최첨단 반도체 생산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즉각 중국에 100% 추가 관세를 부과하고 '모든 중요 소프트웨어'의 수출을 오는 11월 1일부터 통제하겠다고 발표하며 정면으로 맞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퀄컴에 대한 반독점 조사, 미국 선박에 대한 새로운 항만 수수료 부과 등을 거론하며 이번 조치가 중국의 '이례적으로 공격적인' 자세에 대한 대응임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일부 품목의 총관세율은 최대 130%까지 치솟을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중국 조치의 파괴력을 경고한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그레이슬린 바스카란 국장은 "이번 조치는 중국이 쓴 가장 엄격한 수출 통제"라며 "중국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기업을 따르게 할 강력한 수단과 영향력을 가졌음이 명백하다"고 분석했다. 조지타운 대학교 안보·신흥기술센터의 제이콥 펠드고이즈 선임 연구 분석가 역시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희토류 기반 화학물질을 쓰는 칩 제조업체와 희토류 자석을 장비에 통합하는 장비 제조업체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국 간의 강대강 대치는 정치적 수사를 넘어 감정 섞인 설전으로 치닫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을 취소할 수 있다고 위협한 지 몇 시간 만에 자신의 소셜미디어 '트루스 소셜'을 통해 "중국이 전례 없는 태도를 취한 사실에 근거해, 미국은 11월 1일부터 현재 내는 모든 관세에 더해 100%의 관세를 중국에 부과할 것"이라고 전격 발표했다. 그는 "중국이 믿을 수 없는 조치를 했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고 나머지는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며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미 하원 중국 특별위원회의 존 물라나 위원장(공화당)도 성명을 내고 "중국이 미국 경제에 장전된 총을 쐈다"며 이번 조치를 "미국에 대한 경제적 선전포고"로 규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표는 금융 시장을 즉각 강타했다. 뉴욕 증시에서 S&P 500 지수는 2.7% 급락하며 한 주간의 상승분을 모두 반납했고, 나스닥 100 지수는 3.5% 폭락하며 최근 6개월 만에 가장 큰 내림세를 보였다. 미·중 갈등의 불똥은 전 세계로 번지고 있다. 유럽 최대 경제 대국인 독일은 중국의 조치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며 생산을 계속하기 위한 비상조치를 검토하는 등 원자재 공급망 다변화 조치에 나섰고,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와 공동 대응 방안을 찾고 있다. EU는 이전부터 희소 자원 공급망 다변화 정책을 추진해왔으나, 여전히 높은 중국 의존도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혀 있다. 희토류를 주로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사 오는 대만 역시 경제부를 통해 "반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따져보기 위해 추가 평가가 필요하다"며 원자재 가격 변동과 공급망 조정에 따른 간접 영향을 계속 살피겠다고 밝혔다.
무역 분쟁 넘어 '기술 패권' 경쟁으로
이번 사태의 핵심에는 희토류의 전략적 가치가 있다. 희토류는 반도체는 물론 전기차, 풍력 터빈, 스마트폰, 군사 장비에 이르기까지 미래 산업의 명운을 쥐고 있는 핵심 소재다. 현재 중국은 전 세계 정제 희토류 생산량의 60~70% 이상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을 보이고 있다. 반면 미국은 원광을 갖고 있음에도 정제 시설이 거의 없어 중국의 공급 통제에 구조적으로 취약하다. 대체 공급망을 갖추는 데는 여러 해가 걸릴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치가 이달 말로 예정된 시진핑 주석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앞둔 협상용 카드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미 양국이 각각 100% 관세와 희토류 통제라는 칼을 빼 든 이상, 세계 반도체 공급망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갯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짧게는 반도체 장비와 소재의 공급 지연과 가격 급등이 불가피하며, 길게는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희토류 공급망 다변화와 재활용 기술 개발에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무역 분쟁을 넘어 AI 시대의 핵심 자원을 둘러싼 '기술 냉전(technology cold war)'의 서막을 열었다는 분석 속에서, 전 세계가 숨죽여 지켜보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