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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김종삼 '어부'와 자유푸(賈又福) '무제(無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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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 김종삼 '어부'와 자유푸(賈又福) '무제(無題)'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의 도서관이나 미술관을 찾아 우리들 떠나보자. 우리들 곁으로 곧 화사한 날이 다가올 것이다”

어부(漁夫)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老人이 되어서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자유푸(賈又福) '무제(無題)', 종이에 수묵, 20세기, 개인.
자유푸(賈又福) '무제(無題)', 종이에 수묵, 20세기, 개인.


‘무제(無題)’와 처음 마주친 곳은 서울 강남 교보였다. 2009년 5월 21일. 그 날은 목요일이었고 비가 내리던 오후였다. 허전함에 찾았을 것이다. 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샘터, 2009)과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나는 자전거 사고로 강남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목발을 짚고 친구를 만나고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길 기다린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영문학자이자 수필가로 유명한 고(故) 장영희(1952~2009) 교수와 직접 마주하고 인사를 나눴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열혈독자로서 성큼 다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럼에도 그는 반갑게 웃어주었다. 2007년 한여름의 어느 날, 나의 화사했던 기억이다. 너무도 보고픈 작가와의 직접 만나는 시간은 정말 내겐 기쁨이었고 또 기적이었다.

머얼리 노를 저어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老人)이 되어서


이 두 줄이 장영희 책에는 빠졌다. 아니다. (…) 이렇게 처리가 되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굳이 없어도 되는 사족(蛇足)으로 보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름의 억측을 그냥 해본다. 다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두 번째로 읽었다.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차분하게 읽히니 좋았다. 십여 년 전에는 단순히 시가 좋구나, 했는데 김종삼의 시를 또 만나고 보니 수묵화 그림 한 편이 불쑥 마음 밑바닥 위로 뛰쳐나왔다. 그러면서 중국 현대 산수화가 쟈이푸(賈又福, 1942~ )가 그린 ‘무제’라는 수묵화가 얼른 생각났다. 시를 알고 다시 읽은 그 덕분일까, 처음엔 그저 그랬던 그림이 이젠 달리 보였다. 조금은 마음을 열었다. 내게 속삭였다.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림 속의 빈 배가 출렁거리며 삐걱대는 소리가 들리고 여러 번 풍랑에 뒤집힌 적도 있었으나, 어쩐지 그림 속의 오늘(지금)은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는 그러한 모습으로 비쳐진다. 또 어쩐지 이렇게 자꾸 감상하는 시간이 되었다. 한마디로 좋았다. 그러니까 <무제>를 <어부>로 제목을 바꿔 달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우복의 그림은 김종삼의 시로 재해석이 되고 썩 잘 어울린다.

시인 김종삼(1921~1984) 선생님의 시 세계는 대체로 종삼(宗三)의 합을 이룬다. 세 가지(三)가 흰 바탕이자 근원(宗)을 형성하고 있어서다. 그것은 ▲순수한 동심(白)을 지키려는 시 세계 ▲신앙적이며 음악적인 어두운(黑) 시 세계 ▲수묵화 같은 시중유화(詩中有畵)의 시 세계를 대체로 일이관지(一以貫之) 식으로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술 평론가 손철주 작가는 ‘수묵화’ 특징을 이리 언급한 바 있다.

“희고 검고 마르고 촉촉하고 진하고 옅은 이 여섯 가지 변화로 세상사 오묘한 철리를 다 드러내는 것이 수묵화였다. 그곳에는 생활의 인정이 있고 인생의 도가 있으며 삶의 멋이 깃들어 있었다” (손철주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188쪽, 생각의나무, 2006년)

김종삼의 명시 ‘어부’는 18세기 조선의 화가 심사정의 명화 ‘강산야박도(江上夜泊圖)’를 무릇 떠올리게 한다. 그림 속의 어부가 마치 내가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말하는 것만 같이 들린다. 그러니 어쨌든 오늘을 열심히 “사노라”고 한밤 중에 밥벌이 수단인 배를 저어 강가 버드나무 근처에 대면서 하룻밤 외지(外地) 잠을 청하려는 가장의 보통 노동, 그 하루의 일상이 그려진 마무리 같이만 보인다.

심사정 ‘강산야박도(江上夜泊圖)’, 수묵화,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 ‘강산야박도(江上夜泊圖)’, 수묵화,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심사정의 그림 속 어부는 어쩐지 한 가정을 먹여 살려야만 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과 닮아서 참, 공허하고도 시리도록 적막해 보인다. 외로워만 보여서 가난의 궁기(窮氣)가 느껴진다. 그래서 그랬는가. ‘강산야박도’ 그림 상단 오른쪽에서 시작되는 화제시(畵題詩)가 인상적이다. 그 열 글자는 가장 보통의 아비로서 버텨내야 할 무게감을 한층 더해주는 셈이다.

野徑雲俱黑 (야경운구흑)

江船火獨明 (강선화독명)

시골 길엔 구름이 모두 시커멓고

강배만이 저 홀로 불을 밝히네


화제(畵題)의 시는 두보의 오언율시 ‘춘야희우(春夜喜雨)’에 보인다. 빌려 쓴 거다. 미술사학자 이경화는 말하길, “심사정이 41세 되던 1747년에 그렸다. 어둑어둑한 강가에 작은 등불을 밝힌 배가 정박해 있다. 어둠 속에서 등불에 의지해 배를 지키는 외로운 인물은 세상에서 멀어진 채 그림으로만 자신을 표출하고자 한 화가 자신의 쓸쓸한 내면일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말하자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독한 궁핍의 서러움이 ‘여섯 가지 변화’로 그려지고 스민 산수화 작품일 것이다.

1747년. 이 해는 조선 영조 23년으로 정묘(丁卯)年에 해당한다. 중국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가 끝나는 지점에서 ‘정묘육월’이 보인다. 다음으로는 심사정의 아호 ‘현재(玄齋)’가 뒤따르고 있다. 다음은 낙관(落款)이 찍혀 있다.

반가운 비 소식이나 김종삼 시의 화자처럼 어여 화사한 날이 어서 오길 바라는 심정이 잔뜩 배어 있는 그림을 통해 우리는 지금 희망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에 여태껏 우리가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착각을 하면서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의 날들이 우리에게는 “많은 기쁨이 있”을 거라고 넌지시 말하는 것 같아서 자꾸만 오늘을 살아내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김종삼의 어부는 긍재(兢齋) 김득신(1754~1822)의 ‘천렵도(川獵圖)’에 등장하는 농군(아버지들)처럼 더러는 배를 한쪽에 매어 놓고서 왁자하게 잡은 고기를 안주 삼아 술판을 벌이는 그 하루가 있어, 화사한 날이 있기에 잠시나마 시름을 잊고서 크게 웃고 흥이 나서 서로 농담을 술잔 돌리듯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떠들게 되는 것이다.

김득신 ‘천렵도(川獵圖)’, 18세기, 종이에 담채, 간송미술관.이미지 확대보기
김득신 ‘천렵도(川獵圖)’, 18세기, 종이에 담채, 간송미술관.


田家樂事 (전가낙사)

전원(시골)을 꿈꾸는 생활인이 늘고 있다. 공기 좋고 물 맑은 산수 풍광이 뛰어난 곳에 집을 짓고 일하면서 즐거움을 가치로 살고 싶은 꿈은 대개 나이 오십 전후에 무시로 찾아온다. 아마도 그 맘 때가 시작이었을 것이다.

나의 초등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반 친구들의 천렵행은 그래서 해마다 6월이 오면 천렵을 시골로 가고자 찾았다. 올해도 이미 계획은 섰었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발목을 동여매고 있는 실정이어서 맘 같지 않게 몸은 굼뜬 신세에 처해 있다.

그 친구들을 위해 혜곡(兮谷) 최순우 선생(1916~1984)의 김득신 ‘천렵도’ 해설을 여기에다 그대로 옮긴다.

“물가에서 낚시질로 잡은 물고기로 소위 천렵을 즐기는 한 무리의 농군을 그린 것으로서 뱃전에 꽂아 놓은 낚싯대 위에 앉아서 찌꺼기를 노리는 수조水鳥들의 늠실거리는 자세는 이 그림의 허전한 내용에 흥취를 더해 주는 하나의 관점이 된다. 버드나무 고목가지에 훈풍이 나부끼고 술잔을 든 중년 사나이의 시선이 먼 하늘을 쫓는 장면 같은 것도 한국 사람의 성정과 생태를 잘 포착한 표현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夏至)가 코 앞이다.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까지 집콕만 마냥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몸이 근질근질 좀이 쑤신다. 마음이 통하는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내서 천렵을 하루 보내거나 김종삼의 ‘어부’를 읽으면서 가만히 시와 어울리는 그림을 찾아 나서는 여행도 떠날만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의 도서관이나 미술관을 찾아 우리들 떠나보자. 우리들 곁으로 곧 화사한 날이 다가올 것이다.

◆ 참고 문헌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샘터(2009)

김종삼 시, 오민준 캘리그라피, 이민호 글 ‘내용없는 아름다움’, 북치는소년(2020)

손철주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생각의나무(2006)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학고재(2002)

정민·김동준 외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태학사(2011)

이영주 외 ‘두보 근체시 명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2018)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심상훈 작가·인문고전경영연구가, ylmfa97@naver.com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