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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조정권 '독락당'과 라우리츠 아네르센 링 '아침 식사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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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훈의 금상첨화(金相添畵)-조정권 '독락당'과 라우리츠 아네르센 링 '아침 식사 중에'

■ 금요일에 만나는 詩와 그림
조정권의 명시 ‘독락당’은 여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서양화, 즉 ‘캔버스에 유채’의 느낌도 일정 부분 풍기지만 기실 우리 옛 그림인 문인화, 사의화(寫意畵)에 좀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있는 그대로의 풍경과 사물을 그리는 사형(寫形)이 아닌 문인, 선비의 속내를 단지 그림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같은 명작 그림에 푹 빠지게 되는 까닭에는 거칠고 단순해 보여도 그린 이의 정신과 에너지가 고스란히 감상자에게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정권의 시는 한편의 문인화로 독자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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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 / 조정권


독락당(獨樂堂) 대월루(對月樓)는

벼랑 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

내려오는 길을 부셔 버린 이.


라우리츠 아네르센 링 ‘아침 식사 중에’,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스톡홀름국립미술관.이미지 확대보기
라우리츠 아네르센 링 ‘아침 식사 중에’, 19세기, 캔버스에 유채, 스웨덴 스톡홀름국립미술관.

앞서 소개한 조정권(1949~2017)의 시는 육필시집<산정묘지>(지만지, 2012년)에 보인다. 엊그제 아침에, 나는 KTX 열차를 타고 광명에서 출발 부산역에 도착했다. 잠시 정차 중인 객실 안에서 신경주역에서 하차할까, 망설였다. 몹시 갈등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짧은 시간(2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는 현실에 감사했다. 다음에 경주 ‘양동마을’에 가자고, 속을 달랬을 테다.

유림의 고장. 경북 안동엔 ‘하회마을’이 있다면 경남 경주 안강읍의 ‘양동마을’이 반나절 느린 산책 코스로 가볼 만하다. 하회마을엔 서애 류성룡 선생을 모신 병산서원이 있다면 양동마을엔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을 스승으로 모신 옥산서원이 있기 때문이다. 옥산서원이 있는 경주가 외가 고향인 이언적은 1531년 당시의 실세 정치인 김안로의 재임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하고 한양 생활을 깨끗이 청산한다.
고향에 내려왔다. 7년간 칩거했다. 새집을 직접 짓고 살았다고 전한다. 다음이 그것이다.

옥산서원을 보기 전에 이언적 선생이 직접 짓고 살았던 독락당을 찾는다. 독락당은 이언적 선생이 생전에 세운 사랑채 겸 서당으로 그가 보낸 인고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 권력의 실세였던 김안로의 재임용을 반대하다 삭탈관직된 이언적 선생은 본처가 있는 양동마을로 가지 않고 후처가 있는 독락당에서 7년 가까이 거처하며 성리학의 깊은 뜻을 연구했다. (중략) 전면 4칸 측면 2칸인 독락당의 서쪽 1칸은 온돌방이고 나머지 3칸은 마루다. (중략) 머리가 닿을 듯 낮은 천장과 작은 처마를 두른 대청마루는 소박하지만 그 기개는 옹골차다. 자연과 건물이 서로 깍지를 끼고 있는 듯하다. (중략) 독락당의 계정은 날것의 바람소리가 대청마루를 쓸고 생동하는 물소리가 마루를 닦는다. (중략) 여울목 위의 반석 모서리를 반듯하게 파내고서 나무각재를 끼운 외나무다리가 옥산서원의 입구였다. 난간조차 세우지 않은 투박한 외나무다리는 선비의 갓끈을 조이는 마음의 대문이자 속세와 이상세계를 이어주는 치유의 다리였다. (김희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 173~187쪽 참조)

건축학자 김희곤 서울시립대 교수가 언급한 ‘외나무다리’라는 구절과 마주치는 순간, 불현듯 떠오른 시가 한편 있었다. 조정권의 ‘독락당’이 그것이었다. 다시 경주에서 열차가 출발하는 순간, 나는 휴대폰에 저장해 둔 메모장을 펼쳐 시의 전문을 나직하게 읊었을 테다. 다시 봐도, 역시 ‘침잠(沈潛)’과 ‘성찰(省察)’이 뼛속을 타고 파고든다. 서늘한 한기(寒氣)가 온몸에 번진다. 그래서일까, 부산의 구덕도서관엔 저 시가 실은 계단 한쪽 벽을 채우고 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도서관에 ‘딱!’인가. 어울리는 시로 좋은가. 그럴진대 세한(歲寒)이 만발(滿發)!

홀로 즐김(獨樂)의 시공간 필요성-인간 관계와 삶의 질


20여 년 전 일이다. 시카고대학의 심리학·교육학과 교수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가 쓴 <몰입의 즐거움(Finding Flow)>(해냄, 1999년)이란 책이 국내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당시의 베스트셀러로 기억한다. 그는 두 줄의 시를 인용해 ‘일상의 구조’를 설명한 바 있다. 다음이 그것이다.

참다운 삶을 바라는 사람은 주저 말고 나서라.

싫으면 그뿐이지만, 그럼 묘자리나 보러 다니든가.


오든의 시는 이 책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지금 이 순간과, 언젠가 불가피하게 맞이할 임종의 순간 사이에서, 살아가는 길을 택하든가 죽어가는 길을 택하든가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몸에 필요한 영영소가 제대로 공급되는 한 삶은 끊어지지 않지만, 여기서 오든이 말하는 삶은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삶을 방해하는 힘은 사방에 널려 있다. 자칫 마음을 놓았다가는 거기에 놀아나기 십상이다. (중략)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삶의 길은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중략) 희망은 과거에서 오지 않는다. (중략) 철학의 한 갈래인 현상학은 마음을 가로지르는 의식의 흐름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 그리고 이것보다 한층 절박하게 다가오는 질문,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답하기 위하여, 나는 지난 삼십 년 동안 주로 심리학·사회학 같은 사회과학을 수단으로 삼아 체계적 현상학을 발전시키는 데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즐거움>, 9~14쪽 참조)

그렇다.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은 없다. 다만 홀로 걷다 보니까 나만의 길이 필요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뿐이다. 다니지 않으면 길은 웃자란 수풀로 금방 닫히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또 우리가 자꾸만 과거에 집착하는 한 희망은 “벼랑 꼭대기”에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외나무다리 길이 뚝 끊어져서 차마 오를 수가 없다. ‘나’를 방해하는 커다란 바위가 있다면 모서리를 깎고 다듬고 나무를 베어 외나무다리를 깍지로 끼어야만 길이 연결된다. 건너갈 수 있다. 한자 ‘生’이란 낱말을 살피자. 그것은 비유하자면 소(牛) 같은 삶이 외나무(一)를 만나는 끝이 없는 여정이자 과정 같다고 어쩌면 말할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라는 심리학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의 조언은 날카롭더라도 올라타야 한다. 다시 말해 독락당(獨樂堂)이 필요하다. 즉 ‘혼자만 즐기는 사적인 공간으로 방’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화가는 아내의 방을 캔버스에 유채로 담았다. 앞의 그림이 그것이다. 덴마크 화가 라우리츠 아네르센 링(Laurits Andersen Ring, 1746~1828)의 <아침 식사 중에>(1898년 作)를 보자. 그림 속 신문을 보는 핑크빛 원피스의 여인은 화가의 아내, ‘시그리드 쾰러’라고 한다. 이 그림에 우지현 작가는 자기 마음을 비추어 들이민 바 있다. 그림 설명이 재미도 있고 예리한 편이다.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아침에 일어나 문을 열자, 신선한 공기와 함께 은은한 햇살이 집 안으로 들어온다. 나무들이 살짝 노랗게 물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계절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어디쯤인 듯하다. (중략) 여자는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며 고요한 아침을 맞는다. 주방 구석에 청록색 그릇장과 아기자기한 도기들이 자리하고 있고, 새하얀 식탁보를 뒤집어쓴 독특한 모양의 식탁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싱싱한 과일과 달콤한 파이 그리고 차 한 잔이 놓여 있다. (중략) 여자는 비스듬한 자세로 앉아 홀로 식사를 즐기고 있다. 천천히 음식들을 음미하며 신문을 보는 모습이 느긋하고 편안해 보인다.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342~344쪽 참조)

사자성어 중에 ‘이의역지(以意逆志)’라는 말이 있다. 말인즉 <맹자>가 출처다. 다음이 그것이다.

說詩者不以文害辭 (설시자불이문해사)

不以辭害志 (불이사해지)

以意逆志 (이의역지)

是爲得之 (시의득지)

-만장상편(萬章上篇)

거스를 역(逆) 자는 ‘헤아린다’라는 의미로 읽어야 뜻이 통한다. 문(文) 글자, 사(辭)는 어구를 말한다. 일본의 대유학자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1627~1705)의 풀이다. 이토 진사이의 유명한 <맹자고의(孟子古義)>(그린비, 2016년)는 이렇게 번역이 되었다. 참고로 한학자 최경철이 우리말로 번역했다.

“시를 설명하는 사람들은 글자를 가지고 구절을 해치지 않아야 하고, 구절을 가지고 전체의 뜻을 해치지 않아야 하며, 내 뜻을 가지고 시의 의미를 헤아려야 시를 이해할 수 있다.” (최경철 옮김 <맹자고의>, 372쪽 참조)

그렇다. 명화 <아침 식사 중에>를 보고서 우지현 작가는 자신의 뜻(意)을 가지고 명화의 의미를 헤아린 것이 맞다. 하지만 과연 화가의 뜻(意) 출발과 그림 속 모델인 아내의 속내(意)가 헤아림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을 남긴다. 아무래도 부부 관계라고 하더라도 “살아가면서 무엇이 나를 가장 기쁘게 만들고 가장 우울하게 만드는가를 생각할 때, 십중팔구 우리는 타인을 떠올릴 것이다”라고 주장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Mihaly Csikszentmihalyi, 1931~ ) 교수의 분석은 옳게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혼자(獨) 사는 사람을 두고서 서양에서는 ‘idiot’라고 한다. 바보, 멍청이의 뜻으로 쓰인다.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사는 사람”을 두고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 관계에서 득을 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정성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경우 우리는 타인은 지옥이라고 결론짓는 샤르트르의 작품 속 주인공과 같은 운명에 처할 위험에 봉착한다. (중략)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을 하건 친구와 함께 있을 때 더욱 행복을 느끼고 의욕도 올라간다. 공부나 가사노동도 혼자 하거나 식구와 하는 경우에는 마지못해서 하지만 친구들과 같이 하면 신이 나서 한다. (중략) 우정은 서로에게 득을 준다. 이쪽이 저쪽을 착취하는 외적 강제 관계가 아니다. 이상적 우정은 결코 한 자리에 고여 있지 않다. 우정은 늘 새로이 정서적·지적 자극을 주어 권태나 무감각이 스며들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다. (중략)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의 사귐이 일시적이고 피상적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정서적 위기를 맞이한 성인들이 자주 토로하는 고백의 하나가 바로 참다운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중략) 좋은 친구를 사귀기가 워낙 어려워서인지 미국에서는 부모·배우자·자식이 친구처럼 지내는 새로운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즐거움>, 109~114쪽 참조)

최근 들어, 한국 사회도 미국처럼 부모·배우자·자식이 친구처럼 지내는 가정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에 있다. 이는 가정에 미치는 영향력에서 매우 긍정적이며 고무적인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가정의 역학 관계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교수는 이렇게 보충 설명을 한 바 있다.

가령 부부가 모두 직장에 다닐 경우 남자는 직장에선 기분이 별로였다가 집에 돌아오면 풀리는 반면, 아내는 퇴근하면 해치워야 하는 집안일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아 서로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우리의 예상과 달리 우애가 돈독한 가정에서는 오히려 언쟁을 많이 벌인다. 정말로 문제가 있는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피하기에 급급하다. (중략) 아이들의 기분은 어머니의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반면, 어머니의 기분은 식구들에게 이렇다 할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중략) 좋은 가정은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을 복돋우면서도 애정의 울타리 안에 묶어들이는 복합적인 구조 속에서 움직인다. 언제까지 집에 들어와야 하고 숙제는 언제 하고 그릇을 누가 씻는가처럼 허용 가능한 것과 허용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하느라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원칙과 규율은 있어야 한다. (같은 책, 117~118쪽 참조)

다시 앞의 그림으로 돌아가 생각을 해보자. 저 그림이 행복한 느낌을 감상자에게 전달해주는 까닭은 무엇보다 어머니에게 ‘홀로 즐김(獨樂)’의 시공간을 가족이 허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아침 식사와 주방이란 시공간의 자유를 남편인 화가는 아내인 그림 속 여인에게 원칙과 규율을 정한 가정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와 그림을 무시로 읽고 보고 배우면서 옥신각신하더라도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부부라면 말이다. 하물며 가족은 그 원칙과 규율을 습관으로 제때에 익혀야만 한다. 서른은 빠르고 마흔은 알맞고 쉰은 결코 늦지 않은 나이로 보인다.

세 가지 즐거움


김정희 ‘세한도’ 부분, 19세기,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이미지 확대보기
김정희 ‘세한도’ 부분, 19세기, 지본수묵, 국립중앙박물관.

내 안방, 서가엔 솔 출판사가 펴낸 <국역 청장관전서>와 <다산시문집>이 소장되어 있긴 하다. 워낙 방대한 분량이고 책도 무거워서 솔직히 말하자면 제대로 차근차근 읽어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러던 차에, 고전연구회 사암에서 펴낸 <조선 지식인의 아름다운 문장>을 2007년 6월 초에 구입한 바 있다. 재미가 있어 단숨에 읽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났는데, 최근에 다시 보고 있다. 처음 시작하는 부분이 <다산시문집>의 ‘유수종사기(遊水種寺記)’인데 그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참고로 책은 ‘세 가지 즐거움’이란 소제목을 달았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고,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 곳을 출세해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고, 나 혼자 외롭게 찾았던 곳을 마음이 맞는 좋은 벗들과 어울려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다.” (같은 책, 11쪽 참조)

다산 선생의 말이다. 첫 번째 문장에선 한양에서 벼슬살이하다 졸지에 백수가 되어 경주 안강읍 양동마을에 내려와 독락당을 건축한 이언적 선생이 보였다. 두 번째 문장에선 중국의 역사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는 전쟁의 신이자 정치의 하수 한신 대장군이 출세한 후 고향을 방문하는 그 기분이 오롯이 느껴졌다. 세 번째 문장에선 제자들과 함께, 혹은 뜻이 맞는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남양주 운길산 수종사를 방문했을 때, 꼭 그랬지 하는 감회가 글자에 저절로 녹아듦을 깊이 맛보았다.

그러면서 추사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에 그린 <세한도>라는 그림에 나오는 집의 당호(堂號)를 ‘독락당’이라고 문득 짓고 싶었다. 강한 충동 욕구가 부글부글 일었다. 감히 말하건대, ‘독락’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퍼스널 브랜드가 아니다. 왜냐하면 ‘독락’을 저 중국의 역사가이자 정치인 사마광이 이미 크게 쓴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너무 유명한지라, 조선영조 임금 때의 화가 진재해는 <독락원>이란 그림을 그린 바 있다. 여하튼 안타까운 것은 국내 소장이 아니다. 일본 나라현의 야마토분가칸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림의 출처는 그림책 <예원합진(藝苑合珍)>인데, 이 책은 조선 후기 왕실의 왕자와 공주들의 공부용 교재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2020년 끝자락에 서점가에 나온 미술사학자 고연희의 신간 <고전과 경영-조선 왕실의 그림책>(아트북스, 2020년)의 출간은 반갑고도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진재해 '예원합진(藝苑合珍)' 중 '독락원', 19세기, 종이에 채색, 야마토분가칸.이미지 확대보기
진재해 '예원합진(藝苑合珍)' 중 '독락원', 19세기, 종이에 채색, 야마토분가칸.

그림 제목은 <독락원(獨樂園)>이며, 그린 이는 화원화가 진재해이다. (중략) 때는 송나라 신종(神宗, 1048~1085) 시절, 왕안석의 신법이 세상을 이끌고 가면서 반대파인 구법 세력이 무참하게 공격당하던 때이다. 낙양으로 쫓겨온 사마광은 터를 마련하고 홀로 즐기겠노라 선언하며 ‘독락원기(獨樂園記)’를 지었다. (중략) 사마광이 낙양에서 독서하고 저술한 책이 <자치통감>이다. ‘자치통감’이란 제목은, 이 책을 자료로 삼아 세상을 경영하고 이 책을 거울 삼아 세상을 바라보란 뜻이다. (중략) 편년체 역사서이면서 동시에 황제의 통치에 도움이 되도록 쓴 책이다. 책 속에는 온갖 종류의 교활하고 어리석은 인간이 득실거리고 동시에 그 속을 헤쳐나가는 지혜로운 인격과 솟구치는 기상이 반짝인다. (중략) 사마광이 거처했던 독락원에는 독서당이 있었다. 독서당에서 사마광은 책을 읽으며 옛 성현을 스승으로 삼았고 역사 속 인물을 벗으로 삼았다. 사마광의 독락(獨樂)은 거대한 시공(時空) 속 즐거움이었다. (고연희 <고전과 경영-조선 왕실의 그림책>, 112~115쪽 참조)

일찍이 겸재 정선을 박사 논문을 쓴 고연희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조선의 선비 회재 이언적 선생의 독락당이 자꾸만 보였다. 예컨대 사마광의 독락원 글과 그림이 겹쳤기 때문이다.

추사의 <세한도>를 두고, 여태 내 뜻은 춥고 배고프고 고독한 ‘세한(歲寒)’만을 읽고자 했다. 그게 전부가 아닌데 말이다. 이제는 나도 이의(以意)로써 역지(逆志)를 드디어 살피게 되었다. 그렇다. ‘세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는 홀로 즐김의 ‘독락’이 비로소 보인다. 그렇기에 조선 땅에서 가장 먼 곳, 제주의 유배 생활을 추사는 견뎌낼 수 있었으리라. 아울러 후배이자 제자인 이상적에게 선물로 종이에 먹을 잔뜩 묻혀 일필휘지로 <세한도>를 그리는 여유와 선물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캔버스에 유채? 지본수묵?


대개의 명화(名畵)엔 작품을 그린 화가의 이름이 맨 앞에 적히고, 그림 제목이 소개가 된다. 다음이 작품의 재료가 무엇이고 그 다음은 제작년도가 기록이 되고, 소장처가 소개되는 수순을 밟는다. 예컨대 맨 앞에서 소개한 <아침 식사 중에>는 ‘캔버스에 유채’라는 설명이 붙고, <세한도>와 <독락원> 그림에는 ‘지본수묵’이라거나 ‘종이에 채색’이란 글이 보이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캔버스에 유채’라는 말은 캔버스라는 바탕 재질에 유성물감을 써서 그렸다는 뜻입니다. (중략) ‘캔버스(Canvas)’는 종이가 아니라 천입니다. 단어 자체가 ‘삼베로 만든’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 ‘Cannapaceus’에서 유래했거든요. 재질이 억세고 질겨서 천막이나 돛, 배낭을 만들 때 쓰이기도 했습니다만 특히 그림을 그릴 때 많이 사용되었기에 ‘화포(畵布)’라고도 불렀지요. (중략) 유채는 ‘기름에 갠 물감으로 색칠했다’는 뜻입니다. 이런 그림을 유채화, 또는 유화라고 합니다. (중략) 우리 옛 그림의 주재료는 (중략) ‘지본수묵’이라고 적혔지요? 종이 지(紙), 바탕 본(本), 물 수(水), 먹 묵(墨), 즉 ‘종이 바탕에 먹물을 써서 그렸다’는 뜻입니다. <세한도>는 ‘추운 시절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유배 가 있던 시기에 그렸거든요. 모진 고생을 하던 차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한 그림으로, 특히 먹물과 종이의 특성을 잘 살린 작품으로 평가되지요. (최석조 <도화만발>, 65~68쪽 참조)

조정권의 명시 ‘독락당’은 여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서양화, 즉 ‘캔버스에 유채’의 느낌도 일정 부분 풍기지만 기실 우리 옛 그림인 문인화, 사의화(寫意畵)에 좀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있는 그대로의 풍경과 사물을 그리는 사형(寫形)이 아닌 문인, 선비의 속내를 단지 그림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세한도> 같은 명작 그림에 푹 빠지게 되는 까닭에는 거칠고 단순해 보여도 그린 이의 정신과 에너지가 고스란히 감상자에게 전달이 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조정권의 시는 한편의 문인화로 독자의 가슴에 다가와서 촉촉하게 그려질 것이다.

누구나 성인이 되면, 가슴께에다 독락당을 짓게 된다. 인간 관계에서 실패하는 벼랑 끝으로 모릴 때는 상대가 원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먼저 소통(疏通)의 길을 아예 끊고자 절교하게 마련이다. 이때가 가장 큰 고비다. 고비는 두 가지 길로 나뉜다. 이언적과 사마광처럼, 독서하고 사색하면서 재충전을 하면서 기회를 다시 갖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걷는 길이 있는가 하면, 실은 모든 인간 관계를 ‘남의 탓’만 하면서 속절없이 애면글면 ‘혼자 있는 방’에만 길은 더 이상 없다고 들어가려고 한다. 그렇기에 대문을 활짝 열고서 나올 생각을 좀처럼 안 한다. ‘혼자 즐길 수 있는 방’을 찾아야 한다. 찾는 것에 ‘독락(獨樂)’의 정체성이 있다. 몰입의 즐거움을 모르는, ‘나 홀로’는 실로 위험천만하다.

보통 사람은 하루 중 깨어 있는 시간의 삼 분의 일을 혼자서 보낸다. 너무 많은 시간을 혼자서 보내는 사람도 문제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적은 사람도 문제가 있다. 또래들과 어울려 다닐 생각만 하는 청소년은 학교 생활을 잘 하지 못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도무지 배우려 들지 않는다. 반면 외톨이로, 지내는 아이는 우울증과 소외감에 시달리기 쉽다. 오지의 벌목공이나 정신과 의사처럼 물리적·정신적으로 고립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자살할 확률이 높다. 하루의 일과가 꽉 짜여져 있어 심리적 무질서를 낳는 기운이 사람의 의식을 사로잡기 어려운 경우는 예외지만 말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즐거움>, 119쪽 참조)

결론은 이렇다. 이언적과 사마광, 그리고 김정희의 인물됨의 공통점은 순식간에 인싸(인사이더)에서 아웃사이더로 전락했다는 점을 확대해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던 까닭을 살피자면 역시 ‘독락’을 그 비결로 빼놓기가 어렵다. 그들은 아웃사이더가 되어서도 단 하루도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불철주야 공부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역사로 보여준 바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조정권의 시에서 진짜 읽어야할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며/내려오는 길을 부셔 버린 이”는 아웃사이더로서 ‘나’가 되어야 한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긴 휴식의 시간과 더불어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을 가장 먼저 선점해야 한다. 독락을 공부해야 한다. 외로움을 견뎌내야 한다. 그림처럼, 하루 중에 아침 식사의 그 짧은 시간만이라도 제발!

◆ 참고문헌


조정권 <산정묘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김희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 미술문화, 2019.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이희재 옮김 <몰입의 즐거움>, 해냄, 1999.

고연희 <고전과 경영-조선 왕실의 그림책>, 아트북스, 2020.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위즈덤하우스, 2018.

이토 진사이, 최경철 옮김 <맹자고의>,그린비, 2016.

고전연구회 사암, 한정주·엄윤숙 쓰고 엮음 <조선 지식인의 아름다운 문장>,포럼, 2007.

최석조 <도화만발(圖花滿發)>, 아트북스, 2019.


이진우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ainygem2@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