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암시장 환율 차이 노린 '엘 룰로' 차익거래 기승…외환보유액 고갈로 페소화 폭락 위기

부에노스아이레스 공영 은행인 방코 프로빈시아가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개인 투기꾼들은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에서 95억 달러를 공식 환율로 산 뒤 이를 암시장에서 더 비싼 값에 되팔았다. 현지 증권사 ‘원618’은 이 보고서를 인용해 이 금액이 아르헨티나 수확기 농산물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공식 환율로 달러를 싸게 사서 비공식 환전 시장에서 비싸게 파는 방식으로 중앙은행이 달러를 모아 부족한 외환보유액을 늘리려던 노력을 방해했다. 밀레이 대통령은 페소화 가치 하락을 막으려 했지만, 이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공식·암시장 환율 차이 노린 '엘 룰로' 성행
현지 금융 자문사 로마노그룹의 살바도르 비텔리 연구책임자는 "아르헨티나에서는 환전 시장의 틈새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중앙은행 달러를 고갈시키면서 세계 어디에도 없는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핵심은 '엘 룰로(el rulo)'라 불리는 환차익 거래다. 엘 룰로는 돈을 굴려 차익을 남긴다는 의미로 쓰인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정부가 정한 공식 환율과 시장에서 실제 거래되는 환율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투기꾼들은 정부가 통제하는 공식 환율로 달러를 싸게 산 뒤, 비공식 시장(암시장 또는 병행 환전 시장)에서 비싸게 팔아 차익을 챙긴다.
지난달 정치 위기로 암시장 환율이 떨어진 반면 공식 페소화 환율은 중앙은행 개입으로 그대로 유지되면서 두 환율 간 차이가 더 벌어졌다. 이 틈새를 노린 거래자들이 엘 룰로 차익거래에 본격 뛰어들었다.
기업들도 꼼수를 부렸다. 해외 법률 자문료나 정보기술(IT) 서비스 비용 청구서를 허위로 꾸며 수입업자에게만 허용되는 저렴한 공식 환율로 달러를 샀다.
현지 한 증권 중개인은 "뉴욕 트레이더들이 아침에 뉴스를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한다면, 아르헨티나 트레이더는 제일 먼저 중앙은행 공지 페이지를 본다"고 말했다. 그는 "벌금을 내지 않으면서 빠르게 변화를 이용하려면 새로 나온 규칙을 재빨리 해석할 수 있는 훌륭한 법무팀이 매우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규제 강화해도 새 차익 거래 생기는 되풀이
밀레이 정부는 지난달 공식 시장에서 달러를 산 개인이 병행 시장에서 이를 파는 것을 막는 규정을 다시 들여왔다. 중앙은행은 또 많은 아르헨티나인이 투자와 결제에 쓰는 디지털 지갑 앱들에 공식 환율로 달러 판매를 그만두라고 경고했다.
이번 조치는 정부가 최근 몇 주간 수출세 한시 면제를 통해 비축 곡물에서 끌어낸 70억 달러(약 9조 8500억 원) 규모 농산물 수출 달러 가운데 상당 부분을 차익 거래가 삼킨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비텔리는 "부부 가운데 한 명은 공식 달러를 사고 다른 한 명은 병행 시장에서 파는 식으로 아르헨티나인들은 규칙을 피하는 방법을 잘 안다"고 말했다.
규제 강화는 부작용도 낳았다. 공식 환율로 산 달러가 비공식 시장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자, 비공식 시장에 달러 공급이 줄어들어 그곳 페소화 가치가 더 떨어졌다. 그 결과 공식 환율과 비공식 환율 차이가 5%로 더 벌어졌다.
환율 차이가 넓어지면 아르헨티나인들은 중앙은행 달러를 빼내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대표적인 것이 수입 늘리기다. 공식 환율이 실제 시장 환율보다 저렴하면, 수입업자들은 싼값에 달러를 얻어 외국 물건을 사들일 수 있다. 마치 정부가 수입품에 보조금을 주는 것과 같은 효과가 생긴다. 이렇게 수입이 늘어나면 중앙은행 달러는 더 빠르게 바닥난다.
현지 증권사 ‘원618’의 후안 마누엘 파소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미끄러운 비탈길"이라며 "한 곳을 막으면 다른 곳에서 차익거래가 생기고, 그것을 막으면 또 다른 차익거래가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4600만 아르헨티나 국민 전체가 외환보유액을 빼내는 방법을 찾게 된다"고 덧붙였다.
중간선거 앞두고 외환보유액 수십억 달러뿐
이코노미스트들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페소화를 떠받치고 환율 밴드를 지키는 데 쓸 수 있는 유동성 외환보유액이 수십억 달러에 그친다고 본다. 중간선거까지는 3주가 남았다.
밀레이 정부가 외환보유액을 늘리지 못한 것은 최근 몇 주간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아르헨티나 자산 매도를 불렀다. 시장 혼란은 지난달 밀레이가 지역 선거에서 크게 져 자유 시장 개혁 지지가 흔들리면서 시작됐다. 채권 가격과 페소화가 폭락하면서 정부가 곧 현재 환율 밴드에서 페소화를 평가 절하해야 한다는 예상이 커졌고 이는 매도세를 키웠다.
달러 수요는 선거를 앞두고 늘어나는 게 아르헨티나에서는 보통이다. 개인과 기업이 정치 위험에 대비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2019년 보수파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1차 선거에서 좌파 페론주의자들에게 뜻밖에 지면서 더 강해졌다. 당시 아르헨티나 주식시장은 하루 만에 40% 가까이 떨어졌다.
밀레이 대통령은 최근 현지 매체에 "그들은 권력을 얻으려고 모든 것을 불태우려 한다"며 페소화를 팔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팔라고 부추긴 정치 적들을 비난했다.
스콧 베센트 미국 재무장관의 모호한 재정 지원 약속이 변동성을 누그러뜨렸지만 끝내지는 못했다. 페소화는 지난주 10% 올랐다가 이번 주 7% 떨어졌다.
이코노미스트들은 당국이 선거 전 페소화 평가 절하를 피하려고 가능한 모든 것을 팔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선거 뒤에는 환율 정책을 바꿔야 할 것으로 봤다. 경제부 관리들은 이번 주말 워싱턴을 방문할 예정이며, 밀레이 대통령은 오는 14일 백악관을 방문한다.
밀레이 대통령은 최근 현지 라디오 인터뷰에서 "우리는 이런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선거라는 지옥 같은 시기를 견뎌내는 것이 지금 과제"라고 말했다. 이는 선거 때까지만 버티면 이후 본격적인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