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기 보고서 권고안 이행률 11% 불과...연간 800억 유로 투자 필요, 정치적 결단 부족
이미지 확대보기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경고한 대로, 지금까지의 대응은 '느린 죽음'을 막기에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2024년 9월 발표된 드라기 보고서의 383개 권고안 가운데 1년이 지난 지금 완전히 이행된 것은 11.2%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은 향후 2~5년이 유럽의 운명을 결정할 핵심 시기라고 입을 모은다.
삼면 포위된 유럽, 미·중·러 압박의 실상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유럽에 전방위적 압박을 가하고 있다. 2025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NATO 정상회담에서 회원국들은 2035년까지 GDP 대비 5%의 국방비 지출 목표에 합의했다. 이는 기존 2% 목표의 2.5배로, EU 회원국 기준으로 환산하면 614억 유로(약 104조4100억 원) 규모의 추가 부담이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최근 기업 정상회의에서 "우리는 국제 정치·경제 권력의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다"며 "서방이 지난 80년간 경험한 질서가 이제 끝났다"고 선언했다. 그는 EU를 유럽 방위연합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이제 우리는 미국이 우리를 방어해주고, 중국이 원자재를 공급해주며, 러시아가 결국 평화의 길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2024년 유럽의 국방비는 423억 유로(약 71조93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11.7% 급증했지만, NATO 5%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향후 10년간 매년 두 자릿수 증가율을 유지해야 한다. 메르츠 총리는 독일만 GDP의 2% 포인트를 추가해도 약 100억 유로(약 17조 원)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무역 전선도 요동친다. 트럼프는 2025년 4월 EU 상품에 20% 보복 관세를 선언했다가 90일 유예 후 10%로 낮췄지만, 7월 스코틀랜드 턴베리에서 타결된 최종 합의에서 EU는 15% 관세와 750억 달러(약 110조 1000억 원)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 구매, 600억 달러(약 88조 800억 원)의 대미 투자를 약속해야 했다. 자동차에는 25% 관세, 철강·알루미늄에는 50% 관세가 부과된 상태다. 메르츠 총리는 "미국과의 관세 분쟁은 단순한 무역 불일치가 아니다"라며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깊은 균열을 열었다"고 지적했다.
중국과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다. 2024년 EU의 대중 무역 적자는 305.8억 유로(약 52조 원)에 달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구조적 종속이다. EU는 희토류 자석의 98%, 희토류 가공의 91%를 중국에 의존한다. 2025년 10월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를 강화하자 유럽의 자동차·반도체·방위산업체들은 생산 차질을 겪었다. EU가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47.6% 관세를 부과하자 중국은 브랜디에 30.6~39% 보복 관세로 맞받아쳤다.
러시아 요인도 여전히 부담이다. 2024년 EU는 러시아에 219억 유로(약 37조2430억 원)의 화석연료 비용을 지불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지원금 180억 유로(약 30조6000억 원)을 초과하는 금액이다. EU는 2027년까지 러시아 가스 수입 완전 중단을 목표로 하지만, 2024년 기준 여전히 전체 가스 수입의 19%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2024년 러시아 가스 수입은 전년 대비 18% 증가했다. 저렴한 가격의 러시아산 LNG가 유럽으로 계속 유입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부에서 무너지는 토대, 구조적 위기의 심각성
노인부양비는 현재 33.9%에서 2100년 59.7%로 거의 두 배가 된다. 이는 2명의 경제활동인구가 1명의 노인을 부양해야 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재정 여력도 한계에 봉착했다. 2024년 4분기 기준 유로존 국가부채는 GDP의 87.4%, EU 전체는 80.7%다. 그리스(153.6%), 이탈리아(135.3%), 프랑스(113%)는 심각한 부채 부담을 안고 있다. IMF는 추가 조치가 없을 경우 2040년 유럽의 평균 부채비율이 130%를 초과할 것으로 전망한다. 향후 25년간 사회보장·국방·기후 대응에 GDP의 5.75%에 해당하는 추가 지출이 필요한데, 현재의 재정 상태로는 감당하기 어렵다.
생산성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2024년 유럽의 노동생산성 증가율은 0.4%에 그쳤지만, 미국은 1.5%로 유럽의 거의 4배 수준이다. OECD에 따르면 2023년 유로존은 -0.9%의 생산성 하락을 기록했는데, 이는 2009년 금융위기 이후 최악의 성적이다. 이러한 생산성 침체는 유럽이 미국·중국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근본 원인이다.
기술 격차는 절망적 수준이다. 2024년 글로벌 AI 벤처캐피털 투자에서 유럽의 몫은 단 6%에 불과했고, 미국은 61%를 차지했다. 맥킨지 앤 컴퍼니와 브뤼겔 연구소에 따르면 유럽의 R&D 집약도는 GDP의 2.1%로 미국(3.45%), 한국(4.96%)에 크게 뒤진다. 반도체 시장점유율은 8~12%에 머물러 있고, 배터리 생산의 85%는 중국이 장악했다. 맥킨지는 유럽이 기술 경쟁에서 실패할 경우 2030년까지 연간 500억~1조 유로(약 85조~1700조 원) 규모의 가치를 잃게 될 것으로 추산한다.
노동시장의 모순도 두드러진다. 실업률은 5.9%로 역대 최저 수준이지만, 의료·공학·IT 등 핵심 분야에서는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다. 2019~2024년 창출된 일자리의 50% 이상이 비EU 이민자로 채워졌다. 하지만 이민 수용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대응의 딜레마, "야심찬 계획, 더딘 실행"
EU는 일련의 야심찬 산업정책으로 맞서고 있다. 2024년 발효된 넷제로산업법은 2030년까지 청정기술 수요의 40%를 역내에서 충당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핵심원자재법은 2030년까지 전략광물의 채굴 10%, 가공 40%, 재활용 25%를 EU 내에서 달성하고, 단일 국가 의존도를 65% 이하로 제한하는 기준을 설정했다. 유럽반도체법에는 43억 유로(약 7조3100억 원)의 공공·민간 투자가 배정됐고, 2030년까지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10%에서 20%로 두 배 확대하는 것이 목표다.
에너지 안보 강화도 진행 중이다. 2022~2024년 EU는 12개의 신규 LNG 터미널과 6개의 확장 프로젝트를 가동해 연간 수입 용량을 70 bcm 증가시켰다. 재생에너지 비중은 2022년 16.4%에서 2024년 20.5%로 상승했다. 이를 통해 러시아 가스 의존도를 2021년 45%에서 2024년 19%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독자 방위체제 구축 본격화
국방 분야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유럽방위산업강화법(EDIRPA)에는 3억 유로(약 5100억 원)이, 유럽방위산업프로그램(EDIP)에는 15억 유로(약 2조5500억 원)이 배정됐다. 2024년 EU 회원국들의 방위산업 투자는 106억 유로(약 18조2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20% 증가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별 조달의 78%가 외국 공급업체로 가고, 그중 63%가 미국 업체다.
최근 유럽은 미국 의존도를 낮추는 구체적 행동에 나서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프랑스와 라팔 전투기 100대 구매 의향서에 서명했으며, 이달 초 스웨덴과는 그리펜 전투기 최대 150대 구매 의향서를 체결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산 F-16과 프랑스산 미라주를 포함해 2035년까지 총 250대 규모의 전투기 전력을 구축할 계획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리는 매우 강력한 항공전력을 구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번 프랑스와의 합의에는 라팔 전투기 외에도 SAMP/T 차세대 지대공 미사일 체계 8세트와 각 6개의 발사대, 강력한 방공 레이더가 포함됐다. 프랑스 국방참모총장은 유럽산 SAMP/T가 러시아의 미사일 요격에서 미국산 패트리어트 포대보다 효과가 더 크다고 평가했다. 유럽위원회는 우크라이나의 자금 조달 방안으로 EU 동맹국의 무상 지원, EU 차입 자금 대출, 동결된 러시아 자산 연계 대출 등 3가지를 제시했다.
'군사 솅겐' 구축으로 군수 이동 혁신
EU는 더 나아가 역내 군대와 군수 장비의 신속한 이동을 보장하는 이른바 '군사 솅겐(military Schengen)' 구축에 나섰다. 유럽위원회는 다음 장기 예산(2028~2034년)에 철도와 항만 같은 핵심 인프라 개선에 176.5억 유로(약 30조50억 원)을 투입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는 이전 예산(2021~2027년)의 17억 유로(약 2조8900억 원)보다 10배 이상 대폭 늘어난 규모다.
이 자금은 군 장비의 더 빠르고 원활한 이동을 위해 유럽 전역의 철도 노선, 항만, 교량 등 500곳의 핵심 병목 현상 해소에 집중된다. 특히 EU 가입 후보국인 우크라이나와 몰도바를 EU의 군사 수송 구조에 통합하는 데 필수적이다.
군수품 이동 허가 기간도 현재 최대 45일에서 3일로 단축하는 것이 목표다. 유럽위원회는 '유럽 군사 이동력 강화 대응 체계(EMERS)'를 도입해, 잠재적 군사 비상 상황 발생 시 48시간 안에 발동되어 국경을 넘는 군사 수송에 사전 통보만 요구하도록 할 계획이다.
지난 9월에는 우크라이나 서부와 슬로바키아 및 중부 유럽을 연결하는 유럽 표준 궤간의 22km 철도 노선이 개통됐다. EU는 북부, 남부, 동부, 중부 등 4대 다중 수송 군사 이동 우선 회랑을 지정했으며, 이 가운데 네덜란드에서 독일, 폴란드를 거쳐 우크라이나로 이어지는 북부 회랑 개발이 가장 앞선다.
다만 이러한 제안들은 EU 회원국의 만장일치 합의를 필요로 한다. 외교관들은 '군사 솅겐' 아이디어가 2017년에 우선순위로 떠올랐고, 2018년, 2022년, 2024년에 걸쳐 행동 계획이 세워졌지만 진전이 미미했다고 지적한다. 회원국들은 농업, 어업, 사회 지출 등 "득표에 유리한" 부문에 EU 자금을 돌리려는 경향이 있어, 176.5억 유로(약 30조 50억 원) 규모의 투입안이 그대로 통과될지는 미지수다.
드라기 보고서의 엄중한 경고
드라기 보고서는 이 모든 노력이 불충분하다고 일갈한다. 2024년 9월 발표된 400페이지 분량의 이 보고서는 유럽이 미국·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연간 750억~800억 유로(약 127조5000억~136조 원, GDP의 4~5%) 투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는 마셜플랜(GDP의 1~2%)의 두 배가 넘는 규모다. 하지만 1년이 지난 2025년 9월 기준, 383개 권고안 중 완전히 이행된 것은 단 11.2%에 불과하다. 드라기는 "지적했던 모든 도전 과제가 더욱 악화됐다"며 비관론을 드러냈다.
각국의 개혁 노력도 엇갈린다. 독일은 2024년 헌법상 부채 제한을 완화해 국방비 증가를 허용했지만,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0.3%, -0.2%)을 기록했다. 프랑스는 2024년 재정적자가 GDP의 6%를 넘으며 심각한 재정 위기에 봉착했다. 반면 이탈리아는 EU 최대 규모인 194.4억 유로(약 33조480억 원)의 회복탄력성기금을 받아 58.4%를 집행하며 EU 전체에서 가장 빠른 진척을 보이고 있다.
자립 가능성, "현실과 환상 사이"
유럽이 진정으로 경제적 자립을 달성할 수 있을지를 두고 전문가들의 평가는 회의적이다.
유럽정책분석센터(CEPA)는 완전한 디지털 자립만 해도 3.6조 유로(약 6120조 원)가 10년간 소요되며, 이는 유럽 연간 GDP의 20%에 해당한다고 추산한다. 브뤼겔 연구소는 "전략적 자율성은 환상적인 독립 추구가 아닌, 다각화에 기반한 상호의존의 전략적 관리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전망은 세 가지 시나리오로 나뉜다. 최선의 경우(확률 20%)는 드라기 권고안의 신속한 이행, 독일-프랑스 리더십 복원, 연간 800억 유로(약 136조 원) 투자 동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경우 2030년까지 GDP 성장률 2~3%를 유지하고 기술 격차를 좁힐 수 있다. 최악의 경우(확률 35%)는 미국의 안보 공약 철회, 50% 관세 부과, 중국-대만 충돌로 인한 공급망 붕괴가 겹치는 시나리오다. 이 경우 GDP는 정체(1% 미만)하고 산업 공동화가 가속화된다.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확률 45%)는 '부분적 진전을 동반한 어정쩡한 대응'이다. 드라기 권고안의 30~40%만 이행되고,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은 지속되며, 선별적 기술 파트너십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경우 2030년까지 GDP 성장률은 1.2~1.5% 수준에 머물고, 미국·중국 대비 상대적 쇠퇴가 완만하게 지속된다. IMF의 2025~2026년 유로존 성장률 전망(0.8%, 1.2%)은 이 시나리오를 뒷받침한다.
대서양 관계의 재조정도 불확실하다. 유럽과 미국의 경제 통합은 역사상 가장 깊다. 7.2조 달러(약 1경569조6000억 원) 규모의 계열사 매출, 1,600만 개의 일자리가 얽혀 있다. 하지만 트럼프 2기의 '거래적' 접근은 전통적 동맹 모델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미국은 심지어 NAFTA 파트너들도 적대시하는데, 유럽이 예외일 리 없다는 비관론이 확산된다.
중국 디리스킹의 현실과 한계
중국 디리스킹(de-risking) 전략의 실효성도 의문이다. 디리스킹은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완전히 단절(디커플링)하지는 않되, 핵심 기술과 전략 물자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를 줄여 위험을 관리하자는 전략이다. EU는 희토류, 반도체, 배터리 등 전략 분야에서 중국 의존도를 낮추고 공급망을 다변화하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브루킹스연구소와 메릭스(MERICS)는 "디리스킹이 시작됐지만,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평가한다. 벨기에 중앙은행 조사에 따르면 유럽 기업들은 중국산 투입재의 40%를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며, 대체 가능성이 낮거나 매우 낮다고 답했다. 인도, 아세안, 중남미, 아프리카와의 대안 공급망 구축이 진행 중이지만, 중국의 10~20년 선발 주자 이점과 비용 경쟁력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다. 중국산 전기차는 30~40% 저렴하고, 태양광 패널은 40~50% 싸다.
유럽, 변화와 쇠퇴의 기로에 봉착
유럽은 향후 2~5년이라는 좁은 시간 창 안에서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 완전한 경제적 자립은 비용과 정치적 분열 때문에 실현 불가능하다. 하지만 집중된 종속을 줄이면서 글로벌 참여를 유지하는 '열린 전략적 자율성'은 여전히 달성 가능하다.
카네기 유럽센터의 진단이 핵심을 찌른다. "유럽인들은 아이디어와 수단을 갖고 있지만, 자신의 강점과 자율성을 주장할 정치력과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기술적 해법은 존재하지만, 정치적 의지는 여전히 요원하다.
현재 이행 속도(1년에 11%)는 변혁적 변화보다는 '어정쩡한 대응' 궤적을 시사한다. 드라기가 경고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 대안은 붕괴가 아닌 '느린 죽음'이다. 급격한 몰락은 아니지만, 수십 년에 걸친 상대적 쇠퇴와 글로벌 영향력 감소가 예견된다. 유럽의 미래는 기술이나 자원이 아니라 정치적 결단력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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