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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28개 평화안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 폴란드의 경고와 한국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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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의 28개 평화안 이후,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언: 폴란드의 경고와 한국의 선택”

“단일 보증자 미국이 무너질 때 – 폴란드는 방 밖으로 밀려났고, 한국은 ‘판을 설계할 것인가’ '결과를 통보받을 것인가‘의 기로에 섰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11월23일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엔 및 기타 국제기구 주재 미국 대표부에서 기자회견 중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제네바/신화 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오른쪽)이 11월23일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유엔 및 기타 국제기구 주재 미국 대표부에서 기자회견 중 발언하고 있다. 사진= 제네바/신화 연합뉴스
폴란드 정치 칼럼니스트 스튜어트 다월(Stuart Dowell)이 최근 폴란드의 국영 공영방송 TVP 소속의 영문 글로벌 뉴스 채널인 TVP World에 기고한 칼럼 “분석: 트럼프의 28개 평화안이 팍스 아메리카나를 위기에 빠뜨리고 폴란드를 위협하는 이유”에서 제기한 주된 메시지는 단순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둘러싼 트럼프의 28개 평화안은 단지 하나의 외교 문건이 아니라, “미국이 더 이상 유럽의 절대적 안보 보증자가 아닌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드러내는 징후이며, 그 결과 폴란드는 더 이상 워싱턴 한 곳에만 기대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경고라는 것이다. 폴란드는 지금 “방 안에서 함께 설계하는 나라”가 아니라 “방 밖에서 결과를 통보받는 나라”가 되는 위험에 직면해 있으며, 따라서 유럽 핵심으로 더 깊이 들어갈지, 동부 전선 블록을 강화할지, 방위 자율성을 키울지 새로운 전략적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요지다.

지난 30년 동안 폴란드는 팍스 아메리카나 위에 자신의 안보를 구축해 왔다. 그 시대는 이제 끝났다.

미국이 유럽의 안보 보증자로 행동하던 세계는 종언을 고하고 있다.

올해 발렌타인 데이에 미국 국방장관 피트 헥셋이 바르샤바를 방문해 폴란드에 “양국 관계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경고처럼 들렸다. 그는 폴란드의 충성을 치하했고, 미군을 주둔하게 해 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지만, 바르샤바가 가장 듣고 싶어 했던 한 가지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미군이 영구히 주둔하겠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이번 주 공개된 28개 조항의 평화안 이후, 그 경고는 이 지역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속도로 현실이 된 것처럼 보인다.

지난주 말 미국 언론에 흘러나온 이 평화안은 혼란스러웠다. 유럽 파트너들과 사전 협의도 없이 등장했고, 러시아식 표현을 담고 있었으며, 누가 나토에 가입할 수 있는지, 나토가 동맹 영토 안에서 어떻게 활동할 수 있는지에 대해 러시아가 발언권을 갖도록 하고 있었다. 폴란드의 도날트 투스크 총리는 X닷컴에서 “그게 어디에 쓰여 있었느냐”고 건조하게 되물었다.

그러나 더 큰 충격은 이번에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기존의 압박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는 점이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2월 오벌오피스 설전, 8월 알래스카 정상회담 이후, 그리고 이제는 유명해진 웨스트윙 ‘지도 집어 던지기’ 장면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러시아의 요구를 젤렌스키에게 강요하려 했다.

이번 주에 벌어진 일은 그 전례들을 모두 뛰어넘는다. 냉전 종식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의 최대치 요구 조건 전체가 크렘린의 요구가 아니라 미국의 공식 정책으로 등장했다.

지난 30년 동안 폴란드는 팍스 아메리카나, 즉 미국의 군사력, 나토 확장, 그리고 외부 세력이 다시는 유럽을 분할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보장 위에 안보 독트린을 세웠다. 28개 평화안은 세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싱가포르 총리는 파이낸셜타임스에 “단일 보증자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는 패전국이 아니다


일요일 제네바 회담에서 유럽 지도자들은 이미 트럼프 계획의 가장 극단적인 조항 일부를 자신들의 역제안에서 누그러뜨렸고, 미국도 이제 그 버전과 함께 일할 의향을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바꾸지는 못한다. 미국은 더 이상 유럽을 러시아로부터 지켜주는 방패로 행동하지 않고 있다. 28개 평화안의 구조는 누가 나토에 가입할 수 있는지, 나토가 동맹 영토 안에서 병력을 어떻게 배치할 수 있는지에 관한 권한을 푸틴에게 넘겨준다. 폴란드 내 유럽 전투기 문제에 관한 조항은 동맹군 전력 배치를 모스크바와 협상해야 할 대상으로 취급한다. 이 평화안은 러시아에게 EU 확대에 대한 영향력까지 부여한다.

이 같은 권리는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가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전쟁을 결정적으로 이기지 못했고,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재앙에 가까운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러시아군은 수십만 명의 병력을 잃었고, 수십 년에 걸쳐 비축해 온 장갑전력과 미사일을 태워버렸다. 여전히 하르키우나 오데사 같은 주요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고 있다. 흑해함대는 크림반도에서 쫓겨났다. 4년에 걸친 동원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자신보다 작고 가난한 이웃을 상대로 단지 몇 미터씩 전진하는 데 그치고 있다.

유럽의 많은 이들은 트럼프 계획을 1945년의 얄타와 비교한다. 당시 열강들은 유럽을 세력권으로 나눠 가졌다. 그러나 힘의 균형을 들여다보는 순간 이 비교는 무너진다. 우크라이나는 패전국이 아니다. 유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고, 인구와 GDP, 국방비 규모에서 러시아를 훨씬 상회하는 동맹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는 국가다.

미국의 피벗


28개 평화안을 둘러싼 미국의 행동은 더 큰 변화라는 맥락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 30년 동안 미국은 유럽의 안보 보증자로 행동할 수 있는 힘과 자원, 정치적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팍스 아메리카나를 떠받쳤던 단극체제(unipolar world)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의 부상은 미국의 전략적 관심을 빨아들이는 경쟁자를 만들어냈다. 기술 확산은 서방이 누리던 옛 우위를 지워버렸다. 값싼 드론, 장거리 타격체계, 오픈소스 인공지능, 민간 자본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어느 한 국가도 군사력에 대한 독점권을 가지지 못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한편, 전 세계를 ‘경찰’하는 비용은 깊이 분열된 미국 국내 정치 속에서 정치적으로 지속 불가능한 수준이 되었다.

28개 평화안을 둘러싼 즉각적인 메커니즘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다. 위트코프와 푸틴의 오랜 특사이자 러시아 직접투자기금(RDIF) 수장인 키릴 드미트리예프는 정상적인 외교 채널 밖에서 움직였다. 국무장관 마르코 루비오는 자신이 설계하지 않은 문서를 두고 방어 논리를 펴야 하는 처지에 내몰렸다. 펜타곤 내부는 부통령 제이디 밴스의 측근 그룹과 전통적인 공화당 인사들 사이에서 갈라져 있다.

여기에 에프스타인 파일 파문, 주요 중간선거를 앞두고 연료가격 상승을 우려하는 트럼프의 불안까지 더해지면서, 이번 사태는 행정적 혼란의 산물처럼 보인다.

트럼프의 기질과 위트코프의 경험 부족에 쏠린 강렬한 관심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들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일 뿐이다. 이런 요소들은 변화의 속도를 앞당길 수는 있지만, 변화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방 밖에 선 이들


1989년 이후 폴란드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기반을 둔 안보 독트린을 구축해 왔다. 미국이 패권국인 상황에서 폴란드에게 가장 안전한 자리는 워싱턴에 최대한 밀착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단극체제 시대에는 잘 작동했다.

폴란드가 해야 할 일은 충성스러운 동맹국으로 행동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이라크 침공과 그 이후 중남부 지역 통치에 2,500명의 병력을 보내는 식이었다. 그 대가로 미국은 나토의 전진 배치 강화의 일환으로 폴란드에 자국 군대를 주둔시켰고, 미사일 방어 기지도 설치했다. 또한 폴란드가 EU 핵심 국가들과 다소 거리를 두고 있어도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지 않도록 묵인해 주었다.

이번 주 벌어진 일들은 폴란드의 이런 전략이 어떻게 풀려나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유럽이 트럼프 계획에 대한 역제안을 만들었을 때, 핵심 결정은 영국, 프랑스, 독일의 이른바 E3가 내렸다. 폴란드는 그 방 안에 없었다.

도날트 투스크 총리는 다른 의제를 위해 앙골라에 가 있었다. 폴란드가 나토 동부 전선에서 가장 큰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지도자들은 그를 회의에 끌어들이려고 움직이지 않았다.

카롤 나브로츠키 대통령의 존재는 문제를 더 키웠다. 그의 우크라이나 회의론은, 미국 정책이 변화하는 와중에 폴란드를 유럽 안에서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이번 사태가 보여준다. 폴란드는 미국의 보증에 모든 것을 걸었는데, 정작 그 보증이 풀려가기 시작하자 방 밖으로 밀려난 것이다.

새로운 자세


폴란드는 세 가지 선택지에 직면해 있다. 방위 정책을 설계하는 핵심 유럽 국가들에 더 가까이 다가갈 것인가, 동부 전선 국가들을 중심으로 보다 긴밀한 블록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특정 파트너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자국의 군사 역량 확대에 집중할 것인가. 폴란드의 미래 전략은 아마 이 세 가지를 모두 조합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며,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지는 정부와 우선순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첫 번째 옵션은 폴란드를 독일, 프랑스, 북유럽 국가들에 더 가깝게 위치시키는 것이다. 이들 국가가 현재 유럽 방위계획의 대부분을 주도하고 있다. 그 원 안에서 일하면 폴란드는 실제 결정이 내려지는 자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만, 의사결정이 느리고 늘 합의를 위해 줄다리기를 해야 한다는 유럽식 컨센서스 정치의 속성을 감수해야 한다.

두 번째 옵션은 러시아의 위협을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발트 3국, 핀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비슷한 위기의식을 공유하며 비슷한 속도로 움직인다. 이들로 구성된 더 긴밀한 지역 그룹은 공동 조달과 공동 군수 체계를 통해 상당한 실질적 무게를 만들어낼 수 있다.

세 번째 옵션은 방위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폴란드는 이미 자국 방위에 상당한 지출을 하고 있다. 탄약, 미사일, 방공체계의 국내 생산을 확대하면 더 큰 속도와 유연성, 그리고 어느 한 파트너에 덜 의존할 수 있는 공간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장기적인 재정 부담은 커진다.

트럼프 계획이 수정된 형태로라도 실제로 관철될지, 혹은 그저 러시아가 시간을 벌기 위해 이용한 또 하나의 도구에 그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점만은 분명하다. 현대 폴란드가 성장해온 세계는 사라졌다.

‘팍스 아메리카나’ 이후의 안보 세계와 한국의 선택


이 TVP World의 분석 기사는 단지 폴란드만의 고민이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모든 전·후방 동맹국이 곧 맞닥뜨릴 질문을 미리 드러낸다. “단일 보증자의 시대가 끝났을 때, 한 나라의 안보는 무엇을 기반으로 설계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미국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고, 어디까지는 관리해야 하는 변수인가.”

트럼프 행정부가 주도한 28개 조항 평화안은 처음부터 “러시아의 위시리스트”라는 비판을 받았다. 미국 내 상원 의원들조차 루비오 국무장관이 비공식 자리에서 “이건 러시아 측 문건이 새어 나온 것에 가깝다”고 말했다고 전했고, 나중에 루비오가 이를 부인하는 해명에 나선 것 자체가 문건의 성격을 둘러싼 혼란을 보여준다. 이 초안에는 우크라이나의 군 병력 상한, 나토 불가입 헌법 명시, 동부 점령지 실질 인정, 나토 추가 확대 중단, 러시아에 대한 제재 완화와 G8 복귀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유럽과 우크라이나는 제네바에서 이 안을 19개 조항 안으로 상당 부분 고쳐냈다. “나토와 러시아가 상호 확장 중단을 약속한다”는 식의 폭발성 높은 표현은 삭제되고, 가장 친러적이던 문장들이 최소한의 모호한 문구로 대체되었다. 그럼에도 구조적인 메시지는 남는다. 미국이 더 이상 절대적인 안보 보증자가 아니라, 러시아와 타협을 모색하는 당사자라는 사실이다. 특히 나토 병력과 유럽 전투기를 어디에 어떻게 배치할지에 대해 러시아와 일종의 ‘협의권’을 부여하는 구조는, 폴란드 같은 전방 국가 입장에서는 “얄타의 망령”을 떠올리게 한다. 폴란드의 칼럼니스트가 이 계획을 “패전하지 않은 러시아를 승전국처럼 대우하는 문건”이라고 규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글이 강조하는 핵심은, 우크라이나 전쟁의 승패와 무관하게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질서가 이미 구조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인식이다. 중국의 부상으로 미국의 전략적 시야는 양분되었고, 드론과 장거리 미사일, 상업 위성, 인공지능이 확산되면서 서방의 군사기술 우위는 상당 부분 상쇄됐다. 여기에 미국 내부의 정치 양극화와 피로감이 겹치며, 세계 곳곳을 “경찰”하는 비용은 더 이상 미국 국내에서 정당화되기 어렵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평화안을 둘러싼 행정적 혼선과 인사 갈등은 이 구조적 피로의 표면적인 증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TVP World의 진단이다.

폴란드 사례가 특히 흥미로운 것은, 한국과 놀랄 만큼 닮아 있기 때문이다. 폴란드는 1989년 이후 “미국에 최대한 가까이 붙어 있는 것이 최선의 안보 전략”이라고 믿어 왔다. 이라크 파병, 아프간 파병 등에서 충성도를 증명했고, 그 대가로 나토 전진 배치 전력과 미사일 방어 기지를 얻었다. 동시에 EU 핵심과 거리를 두는 데 따른 정치·경제적 비용도 미국의 우산 덕분에 어느 정도 회피할 수 있었다. 한국 역시 6·25전쟁 이후 “한미동맹에 기반한 전방 국가 전략”을 채택했고, 베트남 파병, 이라크·아프간 재건 참여 등으로 동맹의 충성도를 입증해 왔다.

그런데 지금 폴란드는, 미국이 러시아와의 타협을 탐색하는 국면에서 “방 안에 있지 못한” 상태에 놓였다. 트럼프 평화안에 대한 유럽 역제안을 만드는 회의에서, 실제 문안을 다듬은 것은 영국·프랑스·독일의 E3였고, 폴란드는 동부 최전선의 핵심국가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없었다. 이는 한국에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진다. “미국이 중국·북한·러시아와 각각의 협상을 진행할 때, 한국은 과연 그 방 안에 있는가. 아니면 사후 통보를 받는가.”

한국이 읽어야 할 신호와 전략적 과제

한국 입장에서 트럼프 28개 평화안 사태가 던지는 신호는 분명하다.

첫째, 힘을 통한 기정사실화와 정치협상의 결합 모델이 국제 관행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지 못하면, 다음 무대는 대만과 한반도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러시아가 전쟁을 완승하지 못했음에도 일정한 영토·안보 이득을 확인받는 방식으로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중국은 대만 해협에서 장기적인 군사·경제 압박과 제한적 무력행사 뒤 정치협상으로 ‘사후인정’을 받는 시나리오를 유혹적으로 느낄 수 있다. 북한 역시 국지 도발과 핵·미사일 위협을 통해 남북 군사경계선의 실질적 변경을 시도하고, 이후 협상으로 이를 굳히려 할 수 있다.

둘째, 미국이 더 이상 유럽과 동아시아를 동시에 무한 책임지는 방패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미국 내에서는 이미 “유럽은 스스로 방위비를 늘리고, 미국은 중국 견제에 집중해야 한다”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평화안 논란 뒤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에 “이제는 유럽이 더 많이 부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 메시지가, 머지않아 한·일을 향해 “대만 유사시 역할을 더 크게 맡으라”, “주한미군의 장기 구조를 재조정하자”는 요구로 번역될 수 있다.

셋째, 단극체제가 약화된 세계에서 동맹국의 정치적 선택지가 늘어나는 동시에, 실질적 책임도 함께 늘어난다는 점이다. TVP World의 기사가 폴란드의 옵션을 “유럽 핵심으로 더 들어가기”, “동부 전선 블록 강화”, “방위 자율성 확대”라는 세 가지로 정리하듯, 한국 역시 “미·일·호주 등 인도태평양 핵심 동맹과의 결속 강화”, “한·미·일 외에 동남아·중부유럽·중견국과의 수평 네트워크 구축”, “장기적인 방위 자율성 확대” 사이에서 조합을 찾아야 하는 시점으로 들어가고 있다.

한국의 전략적 선택: 방 안으로 들어가고, 판을 설계할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은 무엇을 해야 할까.

가까운 몇 년,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판이 어떻게 재편되는지 정확히 읽으면서, 동시에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평화안 논의에서 보듯이, 실질적인 문구를 다듬는 것은 미국과 서유럽의 소수 국가들이다. 한국은 나토–AP4 협의, G7 확대 회의, 미·한·일 3각 협의체에서 “국경 변경 불허”라는 원칙과 “세력권 재분할 반대”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제기해야 한다. 동시에 워싱턴과 브뤼셀, 베를린과 도쿄를 상대로 “어떤 형태의 유럽 평화안도 대만과 한반도에서 무력+협상 모델을 정당화하는 선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차분하게 설득해야 한다.

또한 한국은 대만 유사시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해, 외부용 선언이 아니라 내부용 시나리오를 명확히 준비해 두어야 한다. 후방 기지 제공, 항만·공역 사용, 정보·사이버 지원, 제재 참여, 해・공군 전력의 간접 투입 등 각각의 단계별 옵션을 상정하고, 그에 따라 중국의 경제·금융·관광 보복 시나리오와 미국·일본의 보상 패키지(방산·투자·기술 협력)를 매칭해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폴란드가 지금 “방 밖에서” 느끼는 불안을 한국이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유사시 미국과 일본이 상정하는 한국의 역할을 미리 파악하고, 한국의 입장을 사전에 조율해 두어야 한다.

중기적으로는 방산·첨단산업·외교를 묶은 “전략 패키지”로 한국의 레버리지를 키울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독일–캐나다 CMS 330 계약은, 중견국 캐나다가 전투관리체계라는 고부가가치 기술을 앞세워 북대서양 해군 네트워크의 핵심 축으로 떠오르는 사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한국 방산은 이미 유럽과 중동, 아시아에서 중요한 공급국이 되었고, 반도체·배터리·조선·에너지에서도 한국은 대체하기 어려운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다. 이런 요소들을 “단일 거래”가 아니라, “장기 전략 파트너십”으로 묶어 미국과 유럽, 인도·태평양 파트너들에게 제안하는 것이 중요하다. 폴란드가 방위 자율성을 위해 자국 탄약·미사일 생산 능력을 키우려 하듯, 한국도 중요한 탄약과 미사일, 방공 시스템, 해양 감시 능력에서 자립성을 높여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생산 능력을 동맹국과 파트너의 군수 기반을 보완하는 글로벌 공급 능력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팍스 아메리카나 이후의 질서에서 한국이 “어디에 서고 싶은가”를 스스로 정해야 한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다. 미국 중심 동맹망의 핵심 축으로 남되, 세력균형과 위기관리의 원칙을 미국에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가교 국가’가 될 수도 있고, 폴란드가 고민하듯 동북아–동남아–중부유럽을 잇는 “전방 민주주의 국가 네트워크”의 허브가 될 수도 있다. 혹은 북핵 현실과 중국의 부상을 감안해, 전술핵 재배치나 조건부 핵무장 같은 논의까지 포함한 장기 억제 구조의 재설계를 고민해야 할 수도 있다. 어느 시나리오를 택하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미국이 알아서 지켜줄 것”이라는 사고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점이다.

폴란드의 칼럼은 “현대 폴란드가 성장해온 세계는 사라졌다”고 결론 내린다. 한국 역시 비슷한 문장을 마음속에 떠올려야 할 시점인지 모른다. 한국이 성장해온 세계, 즉 미국이 최종 보증자인 자유주의 국제질서, 그리고 북핵과 중국 위협 속에서도 “동맹만 잘 유지하면 우산은 유지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평화안을 둘러싼 혼선, 독일 해군의 CMS 330 선택, 시진핑과 트럼프의 전화 통화. 각각은 따로 보면 작은 뉴스일 수 있지만, 모두 하나의 큰 흐름을 가리킨다. 단일 패권의 세계는 저물고, 세력권과 기술, 경제가 뒤엉킨 다극적 경쟁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이 새로운 시대에서 한국이 폴란드처럼 “방 밖에 서 있는” 나라가 될지, 아니면 방의 구조 자체를 설계하는 중견국이 될지는, 지금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전략을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