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국별 환경·안전 규정 난립에 유럽 기업 경쟁력 '자충수'…드라기·레타 보고서 "규제 통합 없으면 경제적 쇠퇴"
이미지 확대보기파이낸셜타임스(FT)가 3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EU 단일시장은 30년 이상의 역사에도 국가별 규제 차이로 인해 기업들이 상품·포장·라벨을 각국 기준에 맞춰야 하는 부담을 안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이러한 비관세 장벽이 EU 경제에 44% 관세와 맞먹는 부담을 주고 있다고 추정했다.
12cm 인형에 20cm 라벨, '규제 불합리'의 상징
EU 단일시장의 규제 비효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이케아의 '융엘스코그(Djungelskog)' 코끼리 봉제인형이 꼽힌다. 높이 12cm에 불과한 이 인형 뒤편에는 무려 20cm 길이의 라벨이 달려 있다. 프랑스 환경 규정과 EU 섬유 관련 법률이 이 긴 라벨의 주된 원인이다.
인터 이케아(Inter Ikea)의 로베르타 데시 EU 담당 책임자는 FT와의 인터뷰에서 "단일시장은 이케아에 매우 중요하다. 규모의 경제를 활용해 품질과 기준을 유지하면서 낮은 비용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도 "규정이 조화롭게 적용되고 집행되지 않을 때 큰 문제에 직면한다"고 말했다.
이케아는 프랑스가 2020년 도입한 '트리만(Triman)' 환경 로고 의무화로 인해 자사와 협력업체들이 라벨 분석과 업데이트에 "수천 일의 추가 근무일"을 투입해야 했다고 밝혔다. 전체 이케아 상품 28억 개에 트리만 로고가 인쇄되어 있지만, 실제로 프랑스에서 판매되는 제품은 16%에 불과하다. 역설적이게도 부모들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폐기물 감소를 위해 설계된 라벨을 잘라내는 것이어서, 오히려 쓰레기만 더 늘어난다고 이케아 관계자는 전했다.
중소기업, 관료주의에 "최악의 경영 환경"
EU 역내 무역 장벽은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에 더 큰 타격을 준다. 스웨덴 기업연맹의 안나 스텔링거 부사무총장은 FT에 "우리는 단일시장 때문에 EU에 가입했다. 이것이 우리의 종교"라며 "그런데 상품 분야에서 가장 비논리적이고 불필요한 장애물이 존재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중국이나 러시아, 미국이 유럽에 이런 규제 장벽을 세운 것이 아니다. 유럽이 스스로 만든 장벽이 성장률을 1%에서 10% 이상까지 깎아먹고 있다"고 비판했다. 외부 경쟁국이 아닌 유럽 내부의 규제 분열이 경제 성장을 가로막는 주범이라는 지적이다.
스웨덴의 대표 산업가인 야콥 발렌베리는 "중소기업에게는 엉망진창이다. 가장 큰 문제는 관료주의"라며 "유럽에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번거로워졌다"고 말했다.
페인트부터 팔라펠까지, 국가별 규정 충돌
네덜란드 페인트 제조업체 악조노벨(AkzoNobel)은 프랑스의 트리만 로고, 스페인의 푼토 베르데(Punto Verde), 이탈리아의 영숫자 소재 코드를 모두 표기해야 한다. 1리터 용기에 공간이 부족해 현재는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용 재고를 별도로 보유하고 있다. 실내 공기질 기준도 독일·벨기에·프랑스 등 인접국마다 달라 페인트 테스트와 승인 절차가 국가별로 다르다.
스웨덴 식품회사 세반(Sevan)은 북유럽 시장용 팔라펠(중동 지역에서 유래한 전통 음식으로, 병아리콩이나 누에콩을 갈아 만든 완자를 기름에 튀긴 요리)을 개발하다 황당한 상황에 부딪혔다. 팔라펠에 사용되는 일반 베이킹파우더가 스웨덴에서는 허용되지만, 덴마크에서는 해당 식품 범주에서 승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탄산수소나트륨과 산을 별도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레시피를 변경하고 새로운 규제 승인 절차를 거쳐야 했다. 엘린 잉베스 피크 최고경영자(CEO)는 "스웨덴에서 팔라펠에 베이킹파우더가 괜찮다면 왜 덴마크에서는 위험하다고 보는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연 3720억 유로 성장 기회, 규제 개혁이 열쇠
EU 의회는 2022년 보고서에서 EU 내 규제 복잡성을 완화하고 역내 무역을 촉진하는 조치가 연간 2280억~3720억 유로(약 389조~635조 원)의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수 있다고 분석했다.
지난해 4월 발표된 '레타 보고서'와 9월 발표된 '드라기 보고서'도 EU 단일시장 개혁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전 이탈리아 총리 엔리코 레타가 작성한 보고서는 회원국별 규제 조화와 '제5의 자유'(지식·혁신·연구의 자유 이동) 도입을 제안했다.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마리오 드라기의 보고서는 EU가 미국·중국과의 혁신 격차를 줄이지 않으면 "느리고 고통스러운 경제적 쇠퇴"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7월 프랑스의 트리만 로고 의무화가 상품의 자유 이동을 저해한다며 EU 사법재판소에 회부했다. 그러나 판결이 나올 때까지 기업들은 여전히 해당 로고를 표시해야 한다.
"자충수, 스스로 만든 상처"
세계 2위 컨테이너 해운사 AP몰러-머스크의 빈센트 클레르크 CEO는 "일을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며 "스스로 만든 상처"라고 진단했다. 그는 "어느 한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라며 "악마는 세부 사항에 있다"고 말했다.
스웨덴 기업연맹의 스텔링거 부사무총장은 "단일시장에 대한 논의가 추상적이고 특히 지루하다"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자유무역협정이다. 세세한 것들을 해결해야 추가 성장을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U 단일시장은 상품·서비스·인력·자본의 자유 이동이라는 네 가지 축을 기반으로 30년 이상 운영되어 왔다. 그러나 회원국별 환경·안전·소비자 보호 규정이 난립하면서 '완전한 단일시장'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EU가 미국·중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규제 조화를 통한 실질적인 시장 통합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 기업에 던지는 '규제의 역설'
EU 단일시장의 규제 분열 현상은 한국 수출 기업에 양면적 메시지를 던진다. 현재 EU에 진출한 한국 기업은 약 1만 8786개에 이르며, 전체 수출에서 EU 비중은 10.8%를 차지한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일 브뤼셀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포스코, 현대제철, LG에너지솔루션,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주요 수출 기업들로부터 EU 규제 강화에 따른 애로를 청취했다. 현대자동차 장재량 상무는 "EU 집행위가 연내 발표를 예고한 자동차 패키지 법안과 국내산소재사용요건(LCR)으로 한국산 차량이 불리한 조건에 놓일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현대제철은 철강 저율관세할당(TRQ) 제도 개편 시 한국 철강 쿼터가 약 47% 축소될 가능성을 제기했다.
EU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공급망 실사지침(CSDDD), 디지털 제품 여권(DPP) 등 새로운 규제를 속속 도입하고 있다. 2027년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는 CSDDD는 EU 내 순매출액 4억 5000만 유로(약 7689억 원)를 초과하는 역외 기업에도 적용되어 삼성전자, 현대차그룹, LG에너지솔루션 등 국내 주요 기업이 공급망 인권·환경 실사 의무를 지게 된다. 위반 시 연매출액의 5% 이상 과징금이 부과될 수 있다.
업계에서는 EU의 규제 복잡성이 한국 기업에 이중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EU 회원국별 상이한 환경·안전 규정은 한국 수출품에도 추가적인 라벨링과 인증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반면, EU가 규제 조화에 성공할 경우 단일 기준 충족만으로 27개국 시장에 진입할 수 있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EU 규제 대응 역량을 갖춘 기업과 그렇지 못한 기업 간 차별화가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