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노동부, 401(k) 대안자산 편입 규정안 발표…"투자 다양화" vs "노후 도박" 팽팽
1억 1800만 근로자의 퇴직연금(401k)으로 비트코인·사모펀드 등 대안 자산에 투자 검토
월가, 퇴직연금을 유동성 위기의 탈출구로 삼으려 한다는 비판 거세
국내 퇴직연금, 10년 평균 수익률 2.31% 침체 속에 한국 연금 개혁의 이정표가 될 전망
1억 1800만 근로자의 퇴직연금(401k)으로 비트코인·사모펀드 등 대안 자산에 투자 검토
월가, 퇴직연금을 유동성 위기의 탈출구로 삼으려 한다는 비판 거세
국내 퇴직연금, 10년 평균 수익률 2.31% 침체 속에 한국 연금 개혁의 이정표가 될 전망
이미지 확대보기워싱턴포스트는 지난달 30일(현지시각),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직장인 퇴직연금의 투자 판도를 뒤흔들 초강수를 뒀다고 전했다. 미 노동부가 발표한 규정 개정안에는 401(k) 퇴직연금 계좌에서 비트코인·사모펀드·사모대출(Private Credit)·인프라 등 이른바 '대안 자산'에 투자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명확히 하는 내용이 담겼다. 가상화폐 전문매체 더블록은 이를 두고 "디지털 자산을 미국 퇴직연금 정책에 편입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가장 강력한 시도"라고 평가했다.
이 조치가 마냥 '미국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 이유가 있다. 한국 퇴직연금 역시 2025년 말 약 496.8조 원까지 급성장했으며, 2026년 현재 500조 원 돌파를 눈앞에 두거나 이미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최근 10년 평균 수익률이 2.31%에 머물며 개혁 압박을 받고 있기때문이다. 대한민국 직장인의 노후 지갑이 어떻게 달라질지, 미국의 실험이 그 답을 쥐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왜 지금인가"…유동성 위기에 몰린 월가의 반격
공적 연기금과 대학 기금 등 기관 투자자들은 이미 사모 투자 한도의 상한선에 다가서고 있다. WSJ은 이번 조치를 "부적절한 시점에 이뤄진 월가 로비의 승리"라고 직격했다. 해석하면 간명하다. 월가가 자금 수혈이 막히자, 12조 달러(약 1경 8300조 원) 규모의 미국 퇴직연금 시장을 새로운 유동성 공급원으로 정조준했다는 것이다. 한 국내 자산운용사 연금 담당 임원은 "사모펀드 운용사 입장에서 401(k)는 장기간 환매 요구 없이 대규모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꿈의 창구'"라고 표현했다.
이미지 확대보기12조 달러 시장의 지각변동…규정안의 핵심은 무엇인가
미 노동부가 내놓은 개정안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 401(k) 계좌에서 가상화폐·사모펀드·사모대출·인프라 등을 기존 주식·채권과 동등한 투자 옵션으로 취급하도록 법적 토대를 명확히 하는 것. 둘째, 이를 허용하는 수탁자들에게 '세이프 하버(Safe Harbor·면책 요건)'를 부여해 소송 부담을 경감하는 것이다. 12조 달러에 달하는 미국 퇴직연금 규모를 한눈에 보면 이 조치의 무게가 실감난다.
로리 차베스-데레머(Lori Chavez-DeRemer) 미 노동부 장관은 "이번 개정안은 퇴직연금이 오늘날의 투자 환경을 더 잘 반영하고, 미국 근로자와 퇴직자 가족에게 더 큰 기회를 열어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조치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2025년 8월 서명한 행정명령의 후속 조치로,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노동부와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대안 투자 관련 규제 전반을 재검토하도록 명시적으로 지시했다.
"투자의 민주화" vs "노후를 담보로 한 도박"…쟁점의 두 얼굴
금융권은 즉각 환호했다. 미국 증권산업금융시장협회(SIFMA)의 케네스 벤슨(Kenneth E.Bentsen Jr.) 회장은 "사적 시장 투자 접근권 확대는 일반 저축자들에게 더 넓은 선택권을 제공하는 '투자의 민주화'"라고 평가했다. 실제로 사모펀드 투자는 그동안 블랙스톤·아폴로 같은 대형 기관 투자자나 초고액 자산가들만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상원의원은 "결국 트럼프의 월가 친구들이 마음껏 활용할 거대한 현금 뭉치를 마련해준 것"이라는 취지로 강하게 비판했다. 블룸버그 통신 역시 높은 수수료와 위험 부담 문제를 지적하며 근로자 보호 장치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고 짚었다. 이번 조치는 단순한 '규제 완화'가 아니다. 노후 자금의 성격 자체를 안정형에서 위험 감수형으로 전환하는 구조적 패러다임 교체를 예고한다.
핵심 리스크 3가지…숫자로 보는 위험 지형
대안 자산 편입에 수반되는 핵심 리스크는 △유동성 불일치 △자산 가격 거품 △수수료 착취 구조 등 세 갈래로 나뉜다.
수혜자와 위험 부담자가 명확히 갈린다는 점에서 비판 목소리는 더욱 날이 서 있다. 수혜집단은 블랙스톤·아폴로·블랙록 등 대형 사모자산 운용사, 가상화폐 거래소 및 관련 운용사, 그리고 퇴직연금 플랫폼 기업이다. 반면 금융 이해도가 낮은 일반 근로자는 복잡한 수수료 구조와 장기 락업 조건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미국은퇴협회(AEA)의 브라이언 그래프 최고경영자(CEO)는 이번 규정안이 "401(k)의 가상화폐·사모대출 투자를 기존 주식·채권과 동일하게 취급하도록 의도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시장 영향은 점진적…3단계 시나리오
규정 발표 직후 비트코인이 2% 가까이 오르고 이더리움과 리플이 각각 6~11%대 급등하는
등 가상화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그러나 실물 경제에서의 변화는 단계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법무법인 메이어 브라운(Mayer Brown)의 에린 조(Erin K. Cho) 변호사는 "수탁자들이 소송 위험 완화를 확인하면서 더 넓은 범위의 자산군을 검토할 수 있도록 하려는 취지"라고 풀이했다.
단계별 시장 영향 시나리오를 그려보면 첫째, 1단계(1~2년)는 실질적 자금 유입은 미미하고, 수탁자들이 새 규정 해석과 법적 안전성을 확인하는 과정에 집중한다.
둘째, 2단계(3~5년)는 목표시점펀드(TDF)에 사모대출·인프라 일부 편입 시작. 소규모 비트코인 ETF 편입 등 시험적 포트폴리오 다변화다.
셋째, 3단계(5년 이후)는 비트코인이 전략 자산으로 본격 편입되고, 블랙록·피델리티 등 대형 운용사의 가상화폐 기관 인프라가 연금 시장과 본격 결합이다.
다만 가상화폐 전문 매체 더블록은 실제 시행까지 최대 15개월이 소요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연금 운용사들이 적합한 상품을 개발하고 고용주들이 자체 실사를 마쳐야 하는 절차적 시간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한국 퇴직연금 431조 원에 미치는 파장
한국 퇴직연금 시장은 2025년 말 약 496.8조 원까지 급성장했으며, 2026년 현재 500조 원 돌파를 눈앞에 두거나 이미 넘어선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그러나 KB자산운용 분석에 따르면 최근 10년 평균 수익률은 2.31%에 그쳐 국민연금 장기 연평균 수익률(6.82%)의 3분의 1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전체 적립금의 82.6%가 여전히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묶여 있다. 이러한 침체 속에서 한국 정부는 수익률 개선을 위한 구조 개혁을 추진 중이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3월 26일 53조 3,000억 원 규모로 급성장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에 대한 첫평가를 착수하고, 퇴직연금사업자 평가를 기존 정성 중심에서 수익률 계량 지표 중심으로 전면 개편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서명석 노동부 근로기준정책관은 "퇴직연금사업자의 책임 있는 자산 운용을 유도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실험이 한국에 직접 이식될 가능성은 단기적으로 낮다. 한국은 원금 보장 성향이 강한데다 가상화폐나 사모펀드 편입에 대한 정치적 반발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간접 영향은 이미 진행형이다. 비트코인 ETF 상품 출시 논의, 사모펀드 재간접 펀드를 통한 퇴직연금 편입 경로 확대, 대안 자산 연계 TDF 개발 등 '우회 경로'가 빠르게 현실화될 전망이다.
투자자 체크포인트, 지금 당장 살펴봐야 할 3가지
이번 미국 노동부 조치가 실제로 글로벌 퇴직연금 시장의 판도 변화로 이어지는지를 가늠하기 위해 아래 세 가지 지표를 주시해야 한다. 첫째, 사모대출·사모주식 펀드의 환매 제한 여부다. 유동성 위기가 심화될 경우 이번 조치에 대한 정치적 역풍이 가속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 블랙록·피델리티의 401(k) 연계 비트코인 상품 출시 일정이다. 대형 운용사의 상품화 속도가 실제 자금 유입 시기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다.
셋째, 국내 고용노동부의 디폴트옵션 평가 결과 및 기금형 퇴직연금 법안 통과 여부다. 한국형 대안 자산 편입 논의가 본격화되는 기점이 될 것이다.
이번 조치는 미국이 개인의 노후 자금을 시장 안정장치로 동원하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신호다. 월가의 자금조달 위기와 트럼프 행정부의 탈규제 기조가 맞물리면서, 가장 보수적이어야 할 퇴직 자산이 가장 공격적인 자본 시장의 전선으로 끌려 들어오고 있다. 수익률 제고라는 명분 뒤에 '리스크의 개인화'라는 냉혹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국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약 500조 원의 노후 자산이 2%대 수익률에 갇혀 있는 현실은 결국 더 높은 위험을 수용하라는 압박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실험이 성공이든 실패든, 그 과정에서 쌓이는 데이터와 제도적 경험은 한국 연금 개혁의 설계도가 될 수밖에 없다. 제도 도입보다 안전장치 설계가 먼저라는 교훈을 미국의 시행착오에서 미리 배울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김주원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