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의 글로벌 경제 투어(7)] '신들의 고향' 강고트리와 리시케슈를 가다

혼자서 여행을 다니면서 짧은 순간 판단이 중요하고 인도 델리에서의 위협에서 내가 수긍하게 되면 나는 앞으로의 모든 여행에서 피동적이고 공포에 떠는 여행객이 될 것 같아 용기를 내서 큰 소리를 내며 환불을 요구했다. 그러자 그 주인은 나를 때리려고 주먹을 올리며 나를 밀쳐 나는 표를 찢어버렸다.
인도 직원이 찰싹 큰소리로 나를 때렸다. 이에 나는 격분해서 그를 세게 밀쳤고 유리창이 깨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이가 든 인도 사람을 젊고 작은 외국인이 때린 것처럼 되었으니 몇몇 인도 사람들이 나를 때릴 것처럼 몰려들었다.
나는 여기서 밀리면 맞아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태권도 자세를 취하고 가장 셀 것 같은 사람을 노려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맞은 것이고, 당신들 역시 이 싸움에 가담하면 경찰과 대사관에서 철저히 책임을 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동안 알고 있던 힌디어 욕을 했다.
●힘겨웠던 히말라야 여정
바가지 쓴 버스비 환불 요구
인도인 여행사 직원과 결투
기죽지 않고 거스름돈 받아
한국인은 태권도에 달인이며 영화나 드라마의 영향 때문인지, 군대를 다녀온 한국 남자의 기에 눌렸던 것인지, 짧은 순간 나에 대한 공격을 머뭇거리는 것을 보며 나는 환불을 해주든지 아니면 정가로 가격을 줄 것인지를 요청했다.

인도 친구들이 같은 인도 친구들에게도 계급이 다르다며 다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름과 집안 심지어는 피부색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는 인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결국 고분고분해진 인도 직원들에게 거스름돈을 받고 나는 유리창 수선비라며 그 잔돈을 주고 차에 올랐다. 차로 가는 나를 공격할까봐 뒷머리에서 땀이 흘렀고, 차에 타면서 빨리 차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렸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50시간이 넘도록 차를 타고 또 갈아타고 계속 북쪽으로 차는 가고 있었다. 티베트 사람이나 네팔 사람들처럼 생긴 사람들이 자주 보였고 멀리 산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담배연기로 가득한 차에는 매우 늙어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가득했고 모두 담배를 물고 있었다.
닭들과 조그만 동물들을 싣고 쉴 새 없이 타고 내리는 사람들 속에 '리시케슈'란 곳에 도착했다. 리시케슈는 인도 힌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신성한 곳으로 다양한 힌두 신들의 사원 그리고 수행자들이 가득했다.
원숭이를 신으로 모시는 곳에서 원숭이들은 음식을 건드리는 일본인들에게 집단으로 공격할 정도로 그곳의 동물들은 보통 내가 아는 동물들이 아닌 신성시되는 동물들이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같은 한민족으로서 타 종교를 비난하고 지역감정과 남북분단, 세대갈등과 계층갈등으로 자기 생각과 주관을 강조하기만 하는 편협한 한국인에게도 이런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와 타인과 타 종교, 타 민족에 대한 관용과 이해가 한국 사회를 성장시킬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리시케슈(Rishikesh)’에서 ‘강고트리(Gangotri)’로 이동했고 갠지스 강의 원류인 신성스러운 장소에서 수많은 인도인들이 거룩한 수행을 하면서 강에서 성스러운 행사를 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강고트리에서 강고트리 빙하가 있는 곳으로 향했고, 결국 엄청나게 쏟아지는 우기의 폭우를 만나 길이 단절되어 수 ㎞를 걸어야 했다.
아마도 힌두의 신은 내가 히말라야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았나보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에 젖은 배낭에 무거워진 옷, 짐, 신발을 버리고 나는 비에 젖은 가난한 외국인이 되어 강고트리에서 며칠을 헤맸다.
●인도 거지에게 받은 도움
지갑 분실하고 델리역에서 노숙
낯선 이방인에게 빵 내밀어
한국서도 그 친절 잊지 못해
히말라야 설산으로의 도전은 산사태로 단절된 여름의 길에서 좌절되었고 추위와 비, 가난과 폭우 속에서 내 인생 최대의 시련을 가져다 주었다. 온갖 종류의 벌레들과 더러운 동물들이 우글거리는 숙소에서 악취와 가려움증, 젖은 옷을 입은 채, 돈 없는 나는 인도의 성지로 불리는 갠지스 강의 원류인 강고트리에서부터 하르드와르(Hardwar)까지 수십 ㎞를 빗속에서 걸었다.
하르드와르에서는 다행히 배낭여행을 온 외국인들과 친해져서 나의 사정을 얻어서 이동했으며, 길에서 모르는 인도인의 차를 얻어타며 델리까지 가게 되었다. 신분증과 돈이 없는 나는 인도 경찰서에 찾아가 숙소를 요청했으나 대답은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어서 결국 두려움 속에 델리 기차역으로 가서 이틀 동안 기차를 기다렸다.

몇 시간을 기다리다보니 배도 고프고 피곤해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인도 역에서 흔히 보이는 거지들이 나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처지도 서럽고 외국인을 신경 쓰는 인도 사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수 시간을 어둠속에서 기다려야 해서 나는 인도 거지가 준 빵을 먹었다.
기차에서는 표가 없으면 차장이 짐을 내던지며 쫓아낸다. 나는 나를 증명할 방법이 없었고 유일하게 기차탑승객 명단이 있는 포스터를 뜯어 차장에게 보여줬다. 기차표가 없고, 내가 예약을 한 이름이 있다며 포스터를 보여주자, 차장은 망설임 없이 나를 밀어냈다. 다행히 내 주변에 앉아있던 인도인들이 기차표가 있었는데 없어졌다며 나를 두둔해주었고, 포스터의 이름을 확인한 차장은 이해했다는 듯이 다음 승객의 표를 확인하러 넘어갔다.
거의 40시간의 기차여행이 계속되었다. 이상한 사람들이 깨워서 돈을 달라고 했고 수많은 아이들이 구걸을 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바뀌었다. 푸네역에 도착한 나는 미터기를 고치고 헤매는 인도 택시 기사에게 조용히 힌디어로 ‘집으로 가지 말고, 경찰서로 가자, 넌 사기꾼이야’라고 이야기했다.
택시 기사는 외국인인 줄 알았다며 다시 미터기를 고치고 집으로 곧장 향했다. 고생으로 얼굴이 마르고, 피부가 까맣고 머리를 양쪽으로 흔들며 인도식으로 옷을 입고, 힌디 말을 하는 나는 ‘푸네 사람’이었다.
미국 남부식 악센트와 미국식 문화에 익숙해졌던 한국인이 영락없는 인도인이 되어 인도 문화와 음식, 생각과 컴퓨터를 배우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참 동안 나는 손으로 음식을 먹었고, 인도 향신료를 사다 먹었으며, 나도 모르게 머리를 흔들며 대답하게 되었다. 긍정적인 ‘노 프로블럼’과 ‘온리 투 미니트’를 외치면서 말이다. 나는 관용과 이해의 항목을 내 삶에 심게 되었고, 가난한 인도인들을 생각하며 내가 받은 도움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인도에서 가져온 파시미나 사업과 대리석 사업을 시도하면서 무역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갖게 된다. 하지만 사업은 쉽지 않았고, 결국 금융회사에 취업하여 금융영업전선에서 새로운 분야로의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