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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후원자 친구들(7)]약탈왕의 이미지 뒤엔 권위 있는 아트컬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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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후원자 친구들(7)]약탈왕의 이미지 뒤엔 권위 있는 아트컬렉터

[예술가와 후원자 친구들(7)] 존 피어폰트 모건


약탈왕의 이미지 뒤엔 권위 있는 아트컬렉터


복합문화공간으로 변신한 저택엔 다양한 기획전시와 연주회 열려


비즈니스맨 초기에 책, 악보, 문학초판본 수집하며 안목 길러

자산 9000억 달러를 예술품 구입에 사용


“예술의 가치는 너무 높아서 값을 매길 수가 없다”




▲ John Pierpont Morgan by Edward Steichen

[글로벌이코노믹=김민희 예술기획가]‘약탈왕’ 또는 ‘갑부가 된 악인’ 또는 ‘거물’…. 바로 제이피 모건(JP Morgan)의 창시자 존 피어폰트 모건(John Pierpont Morgan·1837~1913, 이하 모건)에 대한 이미지다. 그의 강한 인상에는 불도저와 같은 거침없는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모건은 끝없는 열정과 노력으로 부를 이루어 낸 사람으로 살아있을 당시 매우 영향력 있는 금융인이었다. 위대한 미국의 재력가이자 자선사업가, 권위 있는 아트 컬렉터라는 수식어들이 그를 따라다닌다. 그는 금융에 쏟았던 동일한 에너지를 예술품을 모으는데도 사용했다. 두 번째 직업이 아트 컬렉터라고 불렸을 정도이니 말이다.

사실상 금융 제국을 이룬 모건 가문의 이야기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야심, 음모와 정치가 엮여있는 한편의 대서사시다. 하지만 필자는 다른 것보다 예술 후원자로서 미국 문화예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모건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를 풀어 나가보고자 한다.

뉴욕 35가 매디슨 애비뉴에 가면 모건 라이브러리&뮤지엄(Morgan Library&Museum)이 있다. 필자가 뉴욕에 있을 때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잔잔한 클래식 연주가 흘러 나와 관람객들을 반겼다. 네오 클래식 스타일의 우아한 저택은 2006년에 세계적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riano·1937~)의 손길을 타고 기존의 옛 공간을 이어주는 매끈한 유리 건축물과 함께 콘서트홀이 가미되어 대중을 위한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이 공간에서 모건의 컬렉션에 기초한 다양한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서관을 운영하여 예술을 연구·조사하는 사람들에게 귀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모건이 당시 젊은 예술가들과 친분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다. 몇몇 에피소드가 있을 뿐이다. 그의 성격을 보아하니 쉽게 친구가 되기 어려웠을 듯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문화 유산이 젊은 아티스트들과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양성하고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기에 그의 인생이야기가 궁금해졌다. 또한 그의 컬렉션에 대해 깊이 알아보려면 그의 삶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는 것이 중요하다.
▲ John Pierpont Morgan Cartoon
모건은 코네티컷 하트포드 지역의 성공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모건의 아버지, 주니어스 스펜서 모건(Junius Spencer Morgan·1813~1890, 이하 스펜서)은 직물류를 취급하는 비즈니스를 하다가 영국의 금융인 조지 피바디를 만나게 되었다. 피바디는 믿음직한 스펜서를 신뢰해 파트너로 함께 일하게 되었고 결국 후계자가 되었다. 스펜서는 시인의 딸인 줄리엣 피어폰트(Juliet Pierpont·1816~1884)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상인가정의 딱딱한 분위기에 부드러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녀는 매우 독립적인 성격으로 아들과 친한 관계를 형성하지는 못했는데 이로 인한 것인지 모건은 쉽게 상처받는 내면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건이 인생을 통해 이룬 화려한 성공 이면에는 상처받은 두려운 아이가 늘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수학을 잘하고 학교 성적이 좋았던 모건은 열네 살 때 비공식적 첫 컬렉팅을 시작했다. 대통령 밀러드 필모어에게 편지를 써 그의 자필사인을 받았던 것이다. 이 진기한 문서는 후에 모건 컬렉션의 주요 아이템이 된다.

보스턴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다 스위스로 이전했고, 독일에서 괴팅겐 대학을 다녔다. 유창한 프랑스어와 독일어 구사 능력은 후에 금융 일을 하면서 유럽에 수월하게 진출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모건은 19세의 나이로 착실히 아버지의 은행 일을 도우며 금융계에 데뷔하였고, 아버지와 함께 영국자본을 동원해 신흥 미국시장에 투자시키는데 성공했다. 아버지의 사망 후 회사이름을 제이피 모건(JP Morgan & Co.)으로 바꾸어 더욱 활발히 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하게 되었다.

모든 미팅과 거래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건의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과 뛰어난 창조성, 그리고 거대한 체구와 날카로운 눈매를 주로 서술하곤 한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컬렉션에 포함되어있는 그의 사진이 있다. 단검처럼 보이는 팔걸이를 꽉 쥐고 있는 화난 표정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인데 그의 캐릭터를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무명이었던 룩셈부르크 출신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1879~1973)은 모건이 독일 화가 페더 엔케에게 자화상을 의뢰했을 때 앉아있는 시간을 덜기 위해 부탁 받아 사진을 찍어 주게 되었다. 첫 번째는 보통의 포즈로 찍었고, 두 번째가 이 사진으로 작가가 컨셉을 잡아 촬영했다. 스타이켄은 모건의 얼굴을 봤을 때 검고 생명력이 없게 느껴졌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사소한 것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불같이 결정하는 것을 보고 그 성격을 사진에 나타내고자 했다. 왠지 모르게 강한 눈빛 뒤로 슬픔이 보인다. 두려움도 느껴진다. 사진이 현상 되어 나왔을 때 모건은 이 사진을 너무 싫어하여 찢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마음이 풀린 모건이 5000달러라는 많은 액수를 주고 구입했다는 후문이다. 이 사진이 세상에 나왔을 때 선풍적 인기를 끌며 모건 이미지의 아이콘이 되었다. 모건은 어린 시절 꽤 준수한 얼굴이었는데 한 때 피부병을 앓아 피부가 상해 사진 찍는 것을 유달리 싫어했다. 그가 작가에게 그의 자화상을 주문할 때는 보라색 코를 꼭 리터칭하도록 했다.

▲ Morgan Library
모건은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은행가로서의 완벽한 모습과 집에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멋진 남자의 모습. 아마 집에 그가 좋아하는 서적과 예술품들이 가득한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모건은 열정이 대단한 컬렉터로 기억된다. 한 언론에서 그의 컬렉션을 세계 예술품을 끌어당기는 자석으로 묘사한 것이 있다. 모건은 그의 자산의 2/3(지금으로는 9000억 달러)를 예술품을 모으는데 사용했다. 경이로운 액수다. 뉴욕이 세계대전 이후에 파리에 이어 세계적인 예술의 메카가 될 수 있었던 기반을 잘 닦아놓은 사람이다. 모건은 예술을 보는 좋은 눈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 비즈니스맨이었을 때부터 책과 악보, 문학서적 초판본을 모았다. 그리고 40년 동안 유물과 유럽의 예술품을 모으면서 자신의 눈을 훈련시켰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아 보이는 모건은 스물네 살 때 미미라고 불리는 사랑스런 여인 아멜리아 스터거스(Amelia Sturges·1835~1862)와 사랑에 빠졌었다. 그녀가 병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버지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결혼을 하고, 그녀의 건강을 돕기 위해 밝은 햇살이 가득한 북미 지방으로 여행을 다녔다. 알제리로 거처를 옮기고 사업도 포기했다. 아멜리아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쓴 편지에는 모건의 애뜻한 사랑에 대한 감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네 달 후 그는 그의 사랑하는 부인을 하늘로 보내고 혼자가 되었다. 그 아픔이 얼마나 컸던지 나이가 많이 들어서도 종종 우울증의 증상을 보였다고 한다. 그의 로맨틱한 면과 사랑이 책과 예술을 끔찍이 사랑하는 후원자가 되도록 이끌었나 보다. 한편으로 허전한 마음을 예술을 통해 채우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모건이 본격적으로 컬렉팅을 시작한 것은 아버지의 죽음 후 그가 50대가 되어서다. 컬렉팅의 시작은 백과사전적이었다. 서양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이 이루어낸 다양한 분야의 예술품들을 유물에서부터 현대미술까지 모두 모았다. 그의 두 번째 부인 프랜세스 트래시(Frances Tracy)는 모건이 피라미드부터 막달라 마리아의 이빨까지 모든 것을 사들인다고 했다. 그는 몇 천개씩 작품들을 사 모았다. 어떤 때에는 컬렉션 전체를 사기도 하였다. 브론즈, 도자기, 시계, 상아작품 뿐만 아니라 페인팅에서 가구, 벽걸이 융단, 갑옷, 이집트 유물, 또한 희귀도서, 드로잉, 프린트, 동시대 작가들의 초고, 악보 등을 모았는데, 특히 대가들의 드로잉 작품을 엄청나게 구매했다. 예술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펜의 흔적이나, 역사의 기록물들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입체적인 작품에 매력을 느꼈다. 데코레이션 아트나 장인들의 작품을 좋아했고 나중에는 대가들의 페인팅을 컬렉팅했다. 그는 작품을 구매할 때 먼저 스스로 즐겁고 흥미를 느낄 수 있어야 했고, 또한 항상 다른 사람들과 공유될 것을 염두에 두었다.

▲ Qahatika_Girl by Edward S. Curtis
그는 사진을 좋아했다. 사진가 에드워드 큐티스(Edward S. Curtis·1868~1952)의 전폭적 후원자였다. 1906년에 북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1500장의 사진이 담긴 20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 책의 제작을 위해 7만5000달러를 지원했다. 답례로 받은 것은 25세트의 책과 500장의 원본 사진이었다.

모건이 1871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후원자가 되고, 1888년 이사회에 들어가게 되면서 미국 미술에 본격적인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작품들을 기증했고, 1904년부터 죽은 해인 1913년까지는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리더십 아래 뮤지엄은 매우 적극적으로 작품을 획득하는 프로그램이 시작됐다. 그의 아들이 모건이 사망한 후에 대여했던 작품들과 컬렉션의 상당수를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기증했는데, 대략 7000점 정도의 작품들이었다. 이 개수는 이 뮤지엄이 받았던 가장 많은 수의 기증품이었다.

모건은 또한 젊고 창조적인 과학자들을 격려하고 후원했다. 그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Thomas Edison·1847~1931)과 노콜라 텔라(Nocola Tesla·1856~1943)의 가장 주요한 후원자였다는 것이 꽤 흥미롭다. 모건은 또한 미국 자연사박물관,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로마에 있는 미국 아카데미, 그로톤 학교, 하버드 대학, 뉴욕의 라잉 인 하스피탈(Lying in Hospital)을 후원했다.

▲ Edward S. Curtis
그는 특히나 음울한 주제나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들을 싫어했다. 심지어 그의 도서관에는 에로틱한 문학을 전혀 두지 않았다. 그에게는 치열한 전쟁터인 비즈니스세계에서 피 흘리는 싸움으로 어두움은 충분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보수적이지만 건강한 취향과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1901년에 그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지목됐다. 1902년 유명한 건축 회사였던 맥킴 메드&화이트(McKim Mead&White)에게 매디슨 애비뉴에 있는 그의 집에 연결된 건축물을 지어달라고 의뢰했다. 그리고 벨라 다 코스타 그린(Belle da Costa Greene·1883~1950)이라는 젊은 사서를 고용해 이 장소를 미국에서 가장 뛰어난 개인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1924년 모건의 모든 행운과 재산을 물려받은 아들 모건 주니어는 그의 아버지의 자선 사업을 이어받았고,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뉴욕시를 위해, 리서치를 위한 공간인 피어폰트 모건 라이브러리&뮤지엄을 대중을 위해 기증했다.

미국은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자기만의 ‘문화’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도 성공한 기업인들이 자신의 예술 컬렉션을 세우고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기록과 아카이빙 시스템을 중시하는 미국문화를 보며 우리나라도 역사적으로 기록을 매우 중요시 여기던 나라라는 것이 생각났다. 과연 지금의 우리 현실은 어떠한지 궁금해진다. 모건은 “감히 질문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예술의 가치는 너무 높아서 값을 매길 수가 없다”고 했다. 이러한 열정으로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이 세계 3대 뮤지엄이 되지 않았겠는가. 그의 가문은 1980년대부터 그 힘을 잃어갔지만 그가 남긴 예술품과 사회에 기증한 모건 라이브러리&뮤지엄은 그 가치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해갈 것이다.

/김민희 예술기획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