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트이면 질그릇처럼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마음이 옹색해지면 떨어진 터럭처럼 제멋대로 굴러 엉긴다.
<해설>
스킨십을 어떻게 어느 정도 하느냐는 일종의 마음의 서열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스스로 허용한 정도와 상대가 그렇게 하고 싶은 정도 사이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럼 그러한 자기 마음의 우선순위라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느냐, 어떤 몸의 현현으로 먼저 드러나느냐는 그 사람의 마음의 향방을 들여다보는 일종의 바로미터가 된다는 얘기다.
스킨십은 태내의 기억이다. 몸이 주어지는 순간에 벌써 그렇다. 몸이 있고서야 들어섰을 마음은 마음이 있고서야 몸이 닿으려는 본성으로 나타난다. 그러한 스킨십 허용의 개폐는 실제로 그렇게 하든 다만 심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라도 해도 일단의 가족에서 출발하여 사회전체를 매개하기도 한다. 사람은 한 개인이면서 ‘사이’인 人‘間’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도 쉴 새 없이 일으켜져 있는 마음의 정체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이라 해도 몸의 상태를 반영한 불가분의 것이다. 사람의 몸은 엄마의 몸을 빌려 태어나는 그 시점부터 이미 치우친다. 건강해도 사는 단 한순간도 밝은 빛만 같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한 일종의 편향은 나와 닮은 또 다른 편향을 보듬고서야 안심한다. 아기로서는 엄마가 유일이듯, 사람에겐 유일한 이타인 이기를 동시에 획득하고 싶은 본성이야말로 마음을 드러낸 그 첫 번째 행위가 만짐인 이유다.
말하자면 이기를 위해 행위 한 스킨십이 동시에 이타가 되는 순간이 마음과 몸 상태의 건강한 정점, 사랑이다.
/장은조 번역,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