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우섬 한오의 미술로통하다(7)]
늙음과 무사안일을 거부한 '현재 진행형인 영원한 청년' 백남준
낸시랭도 이젠 스캔들로 유명해지긴 보단 뭔가 계속 만들어내야
많은 작품을 보여줄 때 세상은 편견을 버리고 그녀를 사랑할 것
이미지 확대보기균형이 잡힌 사람은 아름답고 편안하다. 아이들은 그 옆에 서면 잃어버렸던 우리의 의젓한 어른을 만나는 느낌이고, 어른들은 집안의 대소사를 치우치지 않게 잘 치러내는 전도양양한 젊은 장손(長孫)을 만나는 느낌일 것이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에게서 그런 느낌이 난다.
균형이 잡힌 사람의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 최소한 아이의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몸통에 비해 머리가 지나치게 커서 뒤뚱거리고 걷다가 넘어지고 수시로 떼쓰고 울고 웃는 아이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양기가 넘쳐서 자기표현이 많고 참을성이 없다. 아이들은 그러한 성정(性情)으로 인해 중병이라도 걸릴라치면 병마를 이겨내기보다는 병마에 희생되는 경우가 더 많다. 참고 견디는 의지가 약한 데다가 잠재적이고 무의식적인 의지마저도 양기가 충만해 있다. 그래서인지 낮에 잘 놀던 아이가 의식이 선명하지 않은 밤중에 아픈 경우가 흔하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기 전 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꾸짖으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너희들 깨어있으라!’
이미지 확대보기하버드대의 노교수 맨스필드의 표현을 빌린다면 진정한 남자는 마초가 아니라 젠틀맨(신사)이다. 이들을 청년이라고도 한다. 음양이 균형이 잡힌 이 청년들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면 늙은 것이란 무엇인가? 혹 세상의 모든 욕된 것들을 모아서 표현하면 되는 것인가?
비겁하여 무사안일주의를 지향하거나 젊은 날 전체 인류가 아닌 자기 주변, 다시 말해 자기 친구와 친족의 안위만 걱정하며 그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주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모습이 늙은 것이다. 특히 시야가 점점 좁아지고 몸과 정신의 균형이 깨져서 양기만 가득 한 채로 나와 가족의 안위와 내 자식들에 대한 걱정으로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바로 늙음이다.
이미지 확대보기과거가 없는 사람을 아이라 하고 미래가 없는 사람을 늙었다고 한다면 젊은이는 과거의 추억과 미래에 대한 책임과 희망을 지닌 사람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인생에서 가치있는 것들을 단념하지 않는 자아가 있음으로써 인간은 젊은이인 것이다. 몸에 양기가 오른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입으로 잔소리만 하는 것이 늙은 것이다.
젊은 날과 달리 성철 큰 스님은 태양인의 기질이 있는 분으로서 노년에는 육체에 양기가 과하여, 상체로만 열심히 수양하시고 하체는 냉하여 윗도리는 벗다시피 하고 아랫도리는 솜바지로 꽁꽁 싸매고 사셨다고 한다. 그런 지경의 육체의 불균형 상태에서도 마음의 균형이라도 지킬 수 있었다면 그것이 곧 깨달음이고 도이고 법일 것이다.
진정으로 늙은 것은 세상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공자님 말씀에 군자는 창을 열고 세상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모든 것이 균형이 잡힌 군자라면 작은 창문을 통해 보더라도 아니 작은 정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조금만 가지고도 세상이치를 알게 된다.
이미지 확대보기어차피 늙은이의 감각은 유행을 따라가기 어렵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그 중심에 서있기는 더욱 어렵다. 아니 기를 쓰고 서 있으려 해도 누군가에 의해 밀려날 것이다. 양기가 오른 노인은 조급하게 세상을 보려는 우를 범한다. 유행도 모르면서 자신의 경험으로 세상일을 판단하고 관여하려 한다.
유행을 모르며 이미 군자의 범위에서 비껴난 사람이라면 유일하게 남아있는 능력이 분별력과 믿음이다. 유행을 아는 능력자를 찾아내 믿고 맡기는 것이 그들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자신이 할일이다. 그렇지 않고 사람을 찾지 않고, 아니 믿을 만한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때부터 절망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맹자가 말씀하셨다. 좋은 제자를 거두고 가르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백남준 작가와 만난 것은 우리가 서울의 같은 화랑에 소속되어 있었기에 서울에서일 것 같은데 생각해보니 그와 실제로 만난 건 대부분 뉴욕에서였다. 한여름을 빼놓고는 길다랗게 치렁거리는 검정오버코트를 걸치고 손에는 사과 하나 들고 껍질째 우적우적 씹으며 맨하탄을 걷는 것이 그의 모습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 남루한 모습은 집시같은 모습의 흉내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한껏 가꾸고 뽐내는 그루밍족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서로 일면식이 없던 필자가 ‘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면 그는 당연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어~그래’하면서 한손을 들어 인사하고 ‘어디 다녀오세요’하고 다시 묻기라도 하면 ‘응, 목요일마다 뒤셀도르프에 강의가 있어서 독일에 갔다가 지금 공항에서 오는 길이야’라고 했다.
이미지 확대보기며칠 전 대통령이 백남준이 세계미술 속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는 기사를 보았다. 무엇을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일까? 그냥 대한민국의 대표적 인물이라 아까워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세계 미술계가 백남준을 떠받들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백남준을 모르고 백남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백남준이라는 작가를 그저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라는 형식적 수사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요셉 보이스가 독일 미술의 국부가 되고 세계미술계에서 대접받는 것은 뒤샹의 변기를 거론하는 만큼이나 그의 작품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가 병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과 미학의 관점에서 요셉 보이스는 완결형이다. 원로로서 대접받는 것이다.
백남준은 중풍을 맞아 거동이 불편한 상태로 미국 대통령의 만찬장에서 자신의 성기를 드러내는 퍼포먼스를 시도한다. 그것이 백남준이다. 비록 스캔달리즘 또는 포퓰리즘으로 치부된다 하더라도 그는 거침없이 성기를 드러내고 피아노를 부수고 바이올리니스트를 벗기고 바이올린을 부순다.
백남준은 그저 자신이 병든 것을 늙은 것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 채 현재 진행형의 젊은이로 사는 것이었다. 이 어려운 이야기를 미술평론이나 미학이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백남준을 이해하려면 스스로 군자가 되는 것이 옳다.
몇해 전 윤진섭이 기획한 팝아트전이 인사동에서 열리고 필자는 어느 화랑에서 낸시랭의 작품을 만난다. 마징가인지 로봇인지 하여간 그런 것을 그렸는데 매우 좋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낸시랭은 필자의 기준으로 요즘의 작가들 중에서 가장 백남준과 닮아있는 작가다.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진행형으로 살아가려는 모습과 젊은이로서 존재하려는 의도다. 그래도 낸시랭이 백남준처럼 되려면 무언가 자꾸 만들어 내야 한다. 스펙과 스캔들에 의한 브랜드가치로서의 유명함 보다는 작품내용으로서의 가치를 만들어 내야한다. 백남준은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집안의 돈을 빌려 바이올린을 사서 부수고 피아노를 사서 부수었다. 그렇게 안했다면 인종차별 심한 그 동네서 백남준은 이름 석자도 내밀 수 없었을 것이다. 작가는 할 수 있는 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야 한다. 그냥 사는 모습으로만 나를 보여 준다면 일반적인 세상은 무가치하게 볼 것이다. 작가는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다.
낸시랭이 많은 작품을 보여줄 때 세상은 편견을 버리고 낸시랭을 더욱 사랑할 것이다. 낸시랭은 이미 작가로서만이 아름다워진다는 현실을 살아간다. 뒤로 물러날 곳이 없을 바에야 앞으로 나가라. 그것이 아름다운 젊은이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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