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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레지스탕스들이여, 사랑이라는 숭고한 혁명을 꿈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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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레지스탕스들이여, 사랑이라는 숭고한 혁명을 꿈꾸라

[북 카페에서 띄우는 인문학 편지(20)]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삼포세대'

그래도 사랑으로 인간의 품위 지키며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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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여름의 끝자락과 다가오는 가을의 첫 자락이 교차하는 이 계절, 그루도 잘 지내고 있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때가 되면 이렇게 알아서 오가는 계절 같은 것을 우리는 자연의 섭리라고 부른단다. 이런 섭리에 따라 곧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가게 될 우리 그루도 아이와 어른이 교차하는 시간 속에서 하루하루 통증이 따르는 성장을 조금씩 이어가고 있겠지? 그렇게 그루가 어른이 되면 가장 먼저 해보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루의 위시리스트 중에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뜨거운 사랑'도 들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오늘은 선생님이 그루에게 ‘사랑이 가장 숭고한 혁명이며 사랑이라는 혁명을 통해 인간은 유토피아에 이를 수 있다’라는 다소 궤변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잠시 귀담아 들어보렴.

어른들은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 유토피아라는 천국은 실현 불가능한 꿈이라고들 말한단다. 근대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내세워 인간의 존재를 신이 증명해주지 않아도 사유하는 주체로서 인간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며 더 이상은 신의 피조물로 남지 않겠다고 선언하지. 이후 이 주체적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며 신의 도움 없이도 합리적 이성과 과학의 힘으로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단다. 그러나 역사는 인간의 합리적 이성이 우리를 데려다 놓은 곳이 아이러니하게도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지. 연이어 터진 세계대전이나 그 와중에 벌어진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학살에서 인간은 더 합리적으로 더 많은 생명을 죽이기 위해 이성과 과학을 끌어다 쓰고 무차별적으로 자연을 파괴했으니까. 그런 세상이 지옥이 아니라고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었던 거야. 이후 주체가 행하는 이성적 사고와 판단이라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옳은 것인가라는 질문들이 쏟아졌고 급기야 이제 주체와 이성을 더 이상 믿지 못하겠다는 회의적인 대답들이 돌아왔어. 이런 맥락에서 중심을 해체하고 정해진 틀을 깨려는 반성적 노력들이 철학과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행해졌는데 이 모든 경향들을 아울러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른단다.
이쯤에서 그루는 “이제 잘못된 지점이 어디인지 알게 되었으니 다시 새로운 방법으로 유토피아를 꿈 꿀 수 있게 되었나요?”라고 묻고 싶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를 꿈 꿀 만큼 평화롭지 못하단다. 심지어 그 유토피아로 가는 길조차 찾지 못하고 여전히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로 남아 헤매고 있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현대의 철학과 예술은 선명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한 채 우리에게 이 세상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인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혹은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이 여전히 불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보통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모습으로 날이 선 경고음만을 내고 있는 중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지.

우리는 이렇게 혼란스러운 시대를 가로지르며 힘들게 살아가고 있어. 그러나 여전히 ‘사람을 희망’으로, 그리고 그 사람의 가슴에 깃든 ‘사랑을 희망’으로 여기며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단다. ‘판도라의 상자’ 그 마지막에 남은 ‘희망’만은 버리지 못한 사람들, 우리를 가로막고 선 많은 문제들을 이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열쇠로 풀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 말이야. 사랑의 사회학자라고 불리는 에바 일루즈는 ‘위반과 저항의 아우라를 발산하며 동시에 인간을 지고한 가치의 위치로 끌어올리는’ 마법 같은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격찬하지. 선생님도 역시 메마른 자본의 질서 속에서 철저히 ‘물화(物化,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물건과 물건 사이의 관계로 나타나는 것)’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런 지고한 가치를 지닌 ‘사랑’이 충분히 매혹적인 해답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 계산된 비즈니스와 같은 사랑이 아닌 낭만적 사랑은 무사무욕, 비합리성 그리고 부에 대한 무관심 같은 가치를 그 속성으로 갖고 있는데 이것을 무기로 이윤의 창출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의 논리에 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 그렇게 자본의 시각으로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사심 없는 증여’, 그러니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남을 돌보며 내 것을 내어주는 인간관계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는 거지. 그렇게 가진 것 하나 없는 사람도 가슴에 ‘사랑’을 품었다면 상품이나 물건 혹은 대체 가능한 기계의 부속품 같은 것이 아니라 ‘더운 가슴을 가진 인간’이라고 외칠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선생님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가장 숭고한 혁명을 불러올 이 시대 진정한 레지스탕스들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단다.

그러나 그루야, 슬프게도 생존이 삶의 목표가 된 현대인들에게 손해로만 인식되는 낭만적 사랑의 유토피아로 가는 길을 선택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야. 사실 안타깝게도 자본의 논리에 포획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사랑은 이미 철저히 상품화되어 소비 가능한 것으로 전락해버렸다고 보아야겠지. 우리 사회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상품화된 사랑’의 징후들을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거든. TV만 켜면 청춘남녀의 인위적인 짝 찾기를 재미라는 포장지로 싸서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고 인터넷에만 들어가면 사람을 조건에 따라 각각의 상품으로 내건 수많은 만남 알선사이트나 결혼정보회사들과 접속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어쩌면 우리는 실생활에서도 이미 상품으로 전락한 인간들이 다시 사랑이라는 상품을 고르는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 많은 사람들이, 마음이 공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자신에게 이익이 될 만한 사람을 결혼이나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하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잖아. 우리가 흔히 ‘그 사람의 조건을 보고 선택한다’고 말하는 것은 외모나 학벌, 직업, 사회적 지위 혹은 재산의 정도 등 내면이 아니라 외부적 조건을 따져본다는 것인데 이미 이것은 사랑이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계약 혹은 이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리활동으로 변질되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해야겠지. 시공도 초월할 수 있다는 진짜 사랑이라면 감히 어떻게 이런 경박한 조건들이 끼어들 자리가 있을 수 있겠니.

일러스트=문지현 기자이미지 확대보기
일러스트=문지현 기자
심지어 요즘은 지고지순한 사랑이든 조건을 보고 선택한 사랑이든 이 모든 관계조차 포기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하는구나. 그루도 삼포세대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거야. 스스로를 돌보며 생존하기도 벅찬 경제적, 사회적 환경 속에서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청년층을 가리키는 말이지. 오죽 힘들면 인간이 맺을 수 있는 여러 관계 중 가장 순도가 높은 이런 관계들을 포기하려고 할까? 하지만 그루야, 선생님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구나. 결혼이라는 제도는 다분히 사회적이고 인위적인 것이지만 적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의 질서 속에서 운행되는 섭리라고 믿기 때문이야.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선생님은, 그루가 결혼은 선택의 문제로 여기더라도 사랑만은 포기하지 말고 사수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것도 득실을 따지는 교환가치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진짜로 가슴이 아리는 낭만적인 사랑 말이야.

이제 마지막으로 선생님은, 그루에게 사랑을 통해 유토피아로 가고자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소설 한 편을 소개하려고 해. 페루의 소설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소설가란 자신이 살고 싶었으나 살 수 없었던 세계를, 허구의 방식으로 그러나 허구가 아닌 시대정신을 담은 이야기로 새롭게 창조해내는 반항아’라고 하더구나. 실제로 존재한 사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소설 속 이야기를 통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말처럼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한 번 꿈꾸고 상상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루에게 선생님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박민규의 장편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란다. 그루야, 혹시 못생긴 여주인공이 나오는 연애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니? 아마 없을 것 같구나. 놀랍게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주 못생긴 여자란다. 어린 시절부터‘아름다운 공주와 멋있는 왕자가 만나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는 식의 사랑이야기만 읽고 자라온 선생님에게도 이 소설은 낯설게 다가왔어. 하지만 다 읽고 나서는 가슴이 흔들리는 감응을 경험했단다. 저자 박민규는 아주 못생긴 여자와 잘 생긴 한 남자가 나누는 사랑의 서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아름답게 펼쳐 보여주고 있거든.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선생님은 여러 번 읽기를 멈추고 책장을 덮어야 했어. 화자가 들려주는 새로운 사유의 세계로 나도 모르게 끌려들어가곤 했으니까. 이렇게 이 책은 여기저기 밑줄을 긋게 하는, 사랑에 대한 통찰을 담은 빛나는 문장을 많이 갖고 있어.

사랑은 상상력이야. 사랑이 당대의 현실이라고 생각해? 천만의 말씀이지. 누군가를 위하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누군가를 애타게 그리워하고……. 그게 현실이라면 이곳은 천국이야. 개나 소나 수첩에 적어 다니는 고린도 전서를 봐.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그 짧은 문장에는 인간이 감내해야 할 모든 <손해>가 들어 있어. 애당초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야.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 그래서 실은, 누군가를 상상하는 일이야. 시시한 그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 주는 거야. 그리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거야. 사랑받지 못하는 인간은 그래서 스스로를 견디지 못해. 시시해질 자신의 삶을 버틸 수 없기 때문이지. 신은 완전한 인간을 창조하지 않았어, 대신 완전해질 수 있는 상상력을 인간에게 주었지.(228쪽)

사랑은 시시한 인간을, 곧 시시해질 한 인간을 시간이 지나도 시시해지지 않게 미리 상상해주는 일이고 서로의 상상이 새로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희생해 가는 것이라는 말을 선생님은 지금도 가슴 속에 깊이 새기고 있단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달콤한 설렘만으로 시작 가능하지만 사랑의 지속에는 반드시 자유의 제한을 동반하는 고통과 손해 그리고 시련과 헌신이라는 담보가 필요하지. 이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은 결코 진정한 사랑에 다가갈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해. 그러나 인간의 가슴속에 이기심만 있는 것은 아닐 거야. 선생님은 그 이기심을 뛰어넘는 고귀한 진심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해. 사실 진정한 사랑은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 아니라 그 손해 너머에서 만나는 이익이란다. 사랑하는 자아는 그 사랑과 함께 성장하고 사랑하는 자아는 사랑 안에서 충만하며 사랑하는 자아는 사랑, 그것만으로 또 다른 우주 하나를 얻기 때문이지. 이런 충만한 사랑으로 두 사람이 만든 무수한 유토피아들이, 깨어있는 인간의 힘으로 결집되어 행복한 사회적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초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선생님은 가슴이 따뜻해진단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은 그 사랑을 나누어줄 줄도 아는 법이니까 진정 사랑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고통에, 그리고 사회의 모순에 무관심할 리 없지 않겠니?

소설 속에서 화자는 ‘사랑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라는 말도 한단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지? 우리 그루도 앞으로 진정한 사랑을 통해 생활이 아닌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기를, 그리고 사랑이라는 숭고한 혁명에 동참하는 멋진 레지스탕스가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으로 인간의 품위를 지키며 인간답게 살아가기를. 그루도 수능이 끝나면 선생님이 소개한 이 책을 읽고 우리의 사랑이 어떠해야 하는지 꼭 한 번 깊이 사유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그럼 또 소식 전할 때까지 잘 지내고 다음에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웃으며 만나자. 그루야, 이만 안녕.

2015년 9월 8일
터기쌤 이은정(그루터기 100년 학교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