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에서 마음을 나누는 좋은 친구 관계가 중요하듯이 국가 간 든든한 동맹 구축은 국민의 안녕을 위한 최우선 전략이다. 최근 4차 산업혁명에 기반한 ESG 융합시대가 본격화되면서 국제적 질서에 나타나는 모종의 지각변동은 주시할 만하다. 올해 한·미 동맹 70주년을 기념해 우리 대통령의 바쁜 외교활동는 물론 일본에 대한 통 큰 양보와 미래를 위한 협업으로 전진하는 모든 행보가 파격적이다. 특히 ‘가치동맹’의 주춧돌 위에 안보동맹, 산업동맹, 과학기술동맹, 문화동맹, 정보동맹이라는 다섯 개의 기둥을 세워 종합적으로 지평을 넓혀 가는 전략은 미래를 향해 변모하려는 표명으로 보인다.
본격적인 전기차·신재생에너지 시대에서 대외적으로 살펴보면 ESG시대에 기본 요건인 원자재가 새로운 세력으로 부각돼 원자재 강국들은 공급망 중심에서 주도권을 누린다. 가령 배터리 원자재로서 전 세계 니켈 매장량 20%를 소유한 자원부국 인도네시아는 이미 2020년 전면 수출금지령을 내렸고, 자국에서 초기부터 마지막 생태계까지 생산관리 가능한 기업에만 원자재를 제공한다.
한편 거대 인구를 보유한 중국은 시장력 장악과 함께 첨단기술 자산으로 턱밑까지 치고 올라와 그 기세가 놀랄 정도다. 아직 무역 강국이자 대부(貸付)국인 미국조차 중국 견제에 땀을 흘리고 있다. 현재 100여 개국이 중국을 가장 큰 무역 파트너로 꼽는 데 반해, 미국과 그런 관계에 있는 국가는 57개국에 불과하다. 중국은 지난 10년간 일대일로(一帶一路)를 통해 동맹국 인프라 프로젝트에 1조 달러(약 1249조원)를 빌려주면서 돈을 풀었으나 미국은 역으로 원조를 줄였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중국 무역 규모는 3100억 달러로 한국 총무역의 21.9%를 차지하는 반면 한·미 무역 규모의 비중은 13.5%에 불과하다. 세계적으로 중국 무역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2023.3.23.)는 시진핑이 주창한 ‘다자주의(multilateralism)’의 주목적은 가속화된 글로벌 사우스(세계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중저소득 및 저소득 국가)의 탈달러화와 미국과 서방 자유주의의 쇠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태국 부총리(이코노미스트, 2022.10.01.)는 “중국이 책임감 있는 대국으로서 전 세계 평화 및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건설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발전 목표를 기반으로 균형적이고 지속 가능하며 포용적인 성장을 모색한다”고 옹호했다.
미국은 아직도 분명한 패권 국가이지만 과거보다 나약해진 미국의 균열을 이용해 유럽의 수장들조차 두툼한 선물보따리를 기대하면서 중국으로 몰려가고 있다. 중국 방문 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2023.4.7)은 "우리 유럽인이 이 사안에서 졸개가 돼 미국의 장단과 중국의 과잉 행동에 반드시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여러 상황 중에 최악"이라면서 “유럽은 미국의 속국이 아니며, 동맹은 속국이 아니다”라고 토로했다. 미·중 갈등 앞에서 유럽이 ‘이익이 있으면 독자 노선을 취해야 한다’는 다분히 실용적 발언인 것이다.
이상과 같이 미·중 대결이 심화되면서 나타난 세계 질서의 지각변동에 대해 이코노미스트(2023.04.13.)지는 비교적 중립적인 비동맹 25개국을 선정해 그 특징을 “T-25(Transactional 25)”라고 제시했다. ‘T-25’ 그룹은 중동의 카타르부터 인도가 포함될 정도로 국가의 규모, 경제·정치 체제가 다양하다. 대부분 중견국가가 속해 있는 ‘T-25’는 세계 인구의 45%에 2023년에는 GDP 18%를 차지해 유럽연합보다 규모가 크다. 기존의 중견국을 위한 포럼인 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공)와 G20 같은 조직은 오늘날 ‘T-25’ 그룹을 위한 플랫폼을 마련해준다. 그러나 국가 간 협력 형태로서 분명한 것은 ‘T-25’는 블록과 동맹 같은 ‘단일 통치기구’가 아니며 ‘소다자주의(minilateralism)’ 개념하에 사안에 따라 개별 동맹이나 그룹을 형성할 수 있다. ‘T-25’는 중립적 성향이나 대부분 민주주의 연대의 서방 지도자들이 위선자라고 생각한다. ‘T-25’ 그룹은 1945년 이후부터 이어진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가 파편화되고, 경제적 분리가 가속화되면서 균열의 틈새에서 이쪽과 저쪽 모두와 거래를 모색하는 등 매우 약은 편이다. ‘T-25’ 그룹은 경제적·정치적 균열을 이용해 강대국 사이에서 잔인할 정도로 줄타기를 하는 기회주의적·실용적 전략을 견지한다. 브라질 룰라 대통령은 미국을 제치고 중국에 농산물 수출을 꾀했으며 그 영향력을 아프리카까지 확장하고 있다. 인도·터키·사우디아라비아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 중국의 재력과 큰 시장을 이용해 활동 범위를 아프리카까지 넓히고 있다.
유럽외교협의회(ECFR)의 조사에 따르면 인도인(48%)과 터키인(51%)은 미래 세계 질서에서 서구의 지배력이 상실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처럼 세계에 대한 관점에서 서방과 비서방의 시각 격차는 점차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인도의 외무장관이 “유럽은 유럽의 문제가 세계의 문제이지만 세계의 문제가 유럽의 문제는 아니라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꼬집었듯이 철통같이 고정된 사고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T-25’ 그룹의 생각과 행동은 분명히 범접할 수 없는 모순과 논리가 함께 존재하나 새로운 ESG 융합시대에 따른 국제관계도 창의적인 모색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한국이 수행할 모종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