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암살범. 1949년 6월 백범을 암살하여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감형, 잔형면제를 받았으며 정치적 의혹에 대해 김구 선생 살해 진상 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잠적하였다. 여생을 은신생활로 보내다가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으며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평북 용천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1934년 신의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 밑에서 일하다가 1939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편입했다. 그뒤 중국 등에서 상업 활동을 하다가, 1947년 월남하여 서북청년회 총무부장으로 활발한 우익 활동을 하였다. 이때의 활동으로 당시 특무대장이던 김창룡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1948년 육사 특8기로 입교해 포병사령부 연락장교가 되고, 이듬해 한국독립당에 입당해 백범과 인연을 맺었다.
1949년 6월 26일 낮 12시경, 전투에 나가면 생사를 기약할 수 없으므로 마지막으로 선생을 뵈러 왔다며 경교장으로 백범을 찾아가 그에게 4발의 총탄을 쏘았다. 백범은 순국하고, 이 사건은 당시 정치 상황과 맞물려 많은 의혹을 낳았으나 그의 단독 범행으로 처리되었다. 육군 포병 소위였던 그는 곧바로 특무대에 연행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석달 후 15년으로 감형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포병장교로 복귀하였다가, 1951년에 잔형을 면제받고 대위로 전역했다. 그리고 1953년 2월 15일에 완전 복권되었다.
1991년과 1993년에 권중희로부터 수차례에 걸친 응징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암살 배후에 대한 자백을 하기도 하고 백범 묘소를 강제 참배하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국회 법사위 백범 김구 선생 암살 진상 조사 소위원회에서 증인으로 조사를 받았으나 끝내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1996년 10월 인천시 중구 신흥동 자택에서 박기서에게 피살되었다.
온기동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1699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