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벽사전통춤보존회’(대표 차수정)는 한성준-한영숙-정재만을 이음하는 전통춤 계승·보존 단체이다. 이 단체는 ‘승무’의 정신과 맥을 계승, 전통춤의 올바른 정립과 전통성을 이어가는 무용 전공자들이 뜻을 같이한다. 이번 공연은 경기도 화성 출신의 정재만(1948년 3월 4일~2014년 7월 12일) 무용가의 넋을 추모하고 일생의 춤 인생에 대한 존중과 감사를 담아 제자들이 헌정한 무대였다. 정재만은 생전에 춤을 향한 고뇌와 인내가 삶이 되어버린 무용가였다.
무용 교육에 대한 집념과 전통춤의 세계화를 꿈꾼 정재만의 삶은 온전히 춤 자체였다. 동시대 전통춤 예인들은 빠른 춤 환경의 변화와 장르 간 경계 허물기에 직면하여 가치관의 혼란과 갈등을 겪었다. 정재만은 늘 진실한 춤으로 세상과 소통하였고, 무용교육자로서의 삶과 무대 위 모습들은 후학들의 미래 원동력이자 교본이 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한국 춤의 향방을 제시했으며, 근간의 맥락을 바로 세우고, 가치 있는 춤의 진실성을 이어가도록 했다.
'커다란 태산을 등에 짊어지듯…'은 ‘무거운 바윗돌을 매단 듯이 무게 있게 춤을 추라’고 강조했던 스승 정재만에 대한 제자들의 그리움을 담는다. 익산 강습회(2014년 7월 12일)에서 귀경 중 교통사고로 타계한 스승을 기린 현대판 ‘진도 씻김굿’의 추모 오프닝 '하늘길.. 꽃을 띄우다'를 비롯하여 한영숙제 정재만류를 공통분모로 한 '승무', '청풍명월(淸風明月)', '살풀이춤', '태평무' 다섯 편이 선보였다. 특히, 팔십여 명의 '태평무' 군무 공연은 감동 그 자체였다.







애절한 사연의 차수정은 국가무형유산 ‘승무’ 이수자로서 비밀의 실타래를 풀어놓듯 정재만 추모 공연을 이어온다. 뜨거운 여름날의 제(祭)는 장엄 소나타의 무(舞)적 연희였다. 그녀는 스승의 가르침을 기억하기 위해 거대한 후학들의 동참을 수용했다. 한국무용사에 한 획을 그은 정재만은 국가무형유산 ‘승무’ 보유자(2000.12~2014.07)로서 1987년부터 숙명여대 교수가 되어 2013년 숙명여대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스승의 이른 타계는 무용계의 큰 손실이었다.
‘정재만을 기억할 수 있도록 정제된 춤의 모든 것’에 걸린 공연, '커다란 태산을 등에 짊어지듯…'을 통해 정재만은 ‘승무’의 적통 승계자였고,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정재만다운 것’에 대한 움직임으로 채워진 공연은 춤의 본이 되기에 충분했다. 정재만류의 춤은 고호의 ‘과수원’을 연상시키는 화사와 이면의 노력을 떠올린다. ‘벽사전통춤보존회’의 무리춤은 무대를 완전히 장악하며 장엄한 추모의 열기와 예술적 심도를 높인 공연이었다.
'오프닝'은 무속신앙과 정화의식을 ‘씻김굿’의 변주로 담백하게 담아낸다. 넓고 긴 천의 하늘 다리에 꽃길을 만들고 존경의 마음을 담아 스승의 넋을 기린다. 무용수들은 느린 움직임으로 위패를 전달하며 존중의 예와 전통춤 이음을 다짐한다. 의식을 이어가는 조밀한 구성은 압도적인 집중을 피워 올린다. 너무나 인간적인 애도의 마음이 구음에 담기고, 푸르고 맑은 분위기에 하얀 소복의 움직임은 한국판 ‘발레 블랑’이다. 배경에 스승의 사진이 달처럼 떠 있다.
차수정 홀춤의 '승무' 완판은 스승 정재만의 ‘춤사위의 무게감과 밀도 높은 장삼놀음’을 재현한다. 이 춤은 몰입 에너지의 확장성이 두드러지며 차수정의 개성과 기량을 가늠케 해준다. ‘장단별 춤사위’가 다채로운 격조의 춤이다. 생존시의 지존이 보여준 '승무'가 암무(暗舞)되어 시원에서 영원까지를 오간다. 흰 밧줄이 사이를 나누고 등을 보인 자세에서 진리를 찾아 구도하는 춤 길은 기교를 높이지 않은 일관된 진정성으로 미학적 가치를 소지하고 있었다.
거문고에 맞추어 부채를 들고 추는 여성무, '청풍명월'은 푸른 바람에 밝은 달을 벗하며 단아하고 깨끗한 마음을 표현한다. 여유롭게 인생을 회상하는 여백미가 강조된다. 춤의 기품과 풍류에서 정재만이 강조한 삶의 철학이 투영된다. 매혹적이되 홀리지 않고, 여유롭되 흐트러지지 않은 여인의 표상은 부채와 보랏빛 저고리의 옷고름이 대신한다. 다체로운 부채의 운용과 기운생동의 원무를 통한 기원이 기교를 넘어선 조선 여성학의 깊이를 가늠하게 만든다.
'살풀이춤'은 숙명여대 초빙교수 김효은을 비롯한 윤하영, 김문옥, 윤예령, 고성현 등의 담백하게 절제된 심미적 아름다움을 보인다. 무용수의 심적 고저, 내면의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하면서 여성미를 두드러지게 표현한다. 천의 적절한 운용과 시각적 이미지 창출, 장대한 여성 무리춤의 묘미를 보여준 춤이다. 온통 백색 복식의 여인들이 진법을 바꾸어 가며 추모의 의미를 더한다. 그 가운데 청일점의 남성이 보인다. 수묵의 느낌으로 벌어지는 '살풀이춤'에서 먹빛은 머리카락뿐, 백색 광휘(transvaluation)가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
'태평무'는 국태민안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춤이다. 벽사전통춤보존회’의 무리춤은 '태평무'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가치적 의미를 극대화한다. 정재만 특유의 안무 구성 등을 교본으로 삼아 다채로운 춤 수사력이 구사되었다. 이번 공연의 대단원은 지난해의 '살풀이춤'에서 '태평무'로 옮겨왔다. 거대한 상상력의 전개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오는 기원무였다. 몰라보게 달라지는 차수정의 수사는 흐르는 시간 속에 자신을 단련하는 도구로 비추어진다.







벽사전통춤보존회 기획의 정재만 추모 11주기 공연은 운집한 추모객과 군무가 하나 된 춤이다. 안무는 세심하게 주제를 향한 무선(舞線)을 조율해 내고 있었고, 연출은 동선의 임팩트와 조화의 어울림을 구상했다. 영상은 과거의 회상과 히스토리를 음미하고 화고하도록 만들었다. 위대한 예술가에 대한 추모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번 공연은 한 시대를 대표했던 명무를 그리워하는 제자들이 남기는 기록영화 같은 깊은 감동을 남긴 공연이 되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