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살아온 사람들' 책 낸 이정희 교수 "배제·반목 되풀이 말아야"
1927·31년 배척사건 등 악몽...6·25 참전 순국도... 화교사 총체적 복원 의미
1927·31년 배척사건 등 악몽...6·25 참전 순국도... 화교사 총체적 복원 의미
이미지 확대보기화교 학생의 "한국 사람들 정말 싫어요" 외침은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이승복 소년의 외침과 겹쳐 들렸고 화교 단체 문전 박대는 서리처럼 차가웠다. 화교를 취재한다고? 모두가 비웃었다.
지방지 기자하며 대구 사야가 집성촌 우록동 취재
이정희 인천대 교수는 눈을 자꾸 꿈뻑인다. 문서를 뒤져보며 오래 연구에 매달리다 보니 시력이 많이 나빠졌다. 대구 사투리로 책이며 신문 등을 '디비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다. 연구실의 마주보는 두 벽면에 빼곡한 책은 책등에 한자가 난무했고 오래된 신문들은 누가 방금 펴보기라도 한 듯 엎드린채 한쪽 어깨를 힘들게 들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땅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왜장 가등청정의 선봉장 사야가 얘기로부터 이 교수의 '화교 연대기'는 시작된다. 사야가는 전쟁이 의롭지 못하다해 개전 며칠만에 부하들과 투항한 항왜 장수다. 이 후손들 집성촌이 대구 우록동에 있다. 대구 영남일보 기자였던 이정희는 사야가 특집을 준비하면서 일본을 찾아 사야가 헌창 모임에 가보고 여러 관계자들도 인터뷰 한다. 그러다 만난 재일교포 강재언 교수가 기자 이정희를 화교 연구자의 길로 인도한다.
재일교포 사학자 강재언 교수 만나 화교연구 외길로
'일본에서 재일교포 차별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한국 화교들이 받는 차별은 상상 초월이다' 등 화교 차별에 대한 얘기로 막걸리 몇 주전자가 비워졌다. 이정희는 강 교수에게 약속한다. 화교 연구에 일생을 바치겠다고.
"그러나 화교 자료는 어디에도 없었어요. 막막해서 일단 대구시내 화교단체와 화교 학교를 찾아갔지만 문전박대였어요" 그런 냉랭한 대우는 기자로서 처음 당했다. 더구나 취재차 들른 화교학교의 고3 남학생의 외침은 분노라고 설명하기엔 너무 깊은 한맻힌 상처의 또다른 도발처럼 느껴졌다. "한국 사람 싫어요. 정말 싫어요"
1999년 그렇게 화교 탐험을 시작됐다. 우선 화교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을 '디비고' (당시엔 중국집이 2, 3개 밖에 없었다) 다녔지만 화교들 반응은 싸늘했다. 화교협회를 찾아가 묻고 또 물었다.
화교 기사 힘입어 일본 대학 전임강사 돼
그래서 '대구의 화교' 6회 시리즈를 낼 수 있었다. 웬 화교 시리즈? 하면서 주변 반응도 시큰둥했다. 편집국장이 힘을 실어 주었다고 한다. 이 신문을 일본 강 교수에게 보냈더니 칭찬이 돌아왔다. 화교 연구 계속해보라는 격려와 함께.
"일본에서 한국인 교수를 뽑는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화교 관련 기사들을 평가 받아서 운좋게 전임강사가 됐죠" 당시 일본은 욘사마 바람이 불었다. 배용준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그리고 이정희의 역작 '조선화교와 근대 동아시아' 가 교토대학출판부에서 나온다.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화인화교학회로부터 연구장려상을 받는다. 이어 교토대학이 그에게 문학박사를 수여함으로써 그는 화교 연구자로 일급대우를 받게 된다.
신포시장 과거 채소시장 등 새로운 사실 밝혀
그의 화교 연구는 황무지를 개척하는 농부의 강한 근육과 힘찬 쟁기질 같았다. 눈이 아픈 고된 노동 뒤엔 희열이 돌아왔다. "제가 책에 소개한 것들은 거의 다 새로운 내용들입니다" 인천의 오래된 신포시장이 사실은 화교 중심 채소시장이었다는 것. 채소 가운데 특히 배추는 화교들의 전공. 대부분 산둥(山東) 출신인 화교들은 메마른 기후의 산둥에서도 배추를 잘 지었는데 한국 오니 비가 적당히 내려 더 농사가 잘 돼 화교들의 배추 농사는 활기를 띠었고 인천 채소 유통 물량의 70%를 차지했다는 것. 그 배추를 만두에 넣으니 또 만두 장사가 잘 됐다. 이들은 거의 비료를 안쓰고 인분을 썼다고 한다.
화교들은 채소 뿐아니라 주물·실크·모시(마포)·면포 등 시장을 장악해 나간다. "당시 조선 전체 포목상의 20%가 화교상이었어요. 매출은 전체의 30% 정도였고요" 비단 장사 왕서방은 이때 나온 얘기다. 이들은 이렇게 부를 쌓았고 자신들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전국적 유대를 갖는다.
이미지 확대보기명동성당 조적공 대부분이 화교였다
명동성당 조적공이 화교였다는 것도 처음 들었다. 빨간 벽돌을 만들고 쌓는 기술이 뛰어나 공사를 화교들이 주도했다는 것. 설계는 프랑스인 선교사가 했지만 조적은 화교 몫이었다. 대구 계산성당, 인천 답동성당도 같은 케이스.
이 걸 다 어떻게 알았어요? 질문에 이정희 눈이 반짝인다. 다 '디빈' 덕이라며 프랑스 선교사 일기에서 찾았다고 했다. 눈의 노동이 희열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겨우 책 얘기를 꺼냈다. 최근 펴낸 벽돌책(848쪽) '경계를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내용이냐고 물었다. 이주와 정착, 배제와 생존의 한반도화교사회 140년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한 세대 두 세대를 거치며 정착과 번영만 있었던 건 아닙니다. 차별과 배척에 전쟁과 분단 그리고 국적과 재산권 문제 등이 겹치는 가운데 정치적 격변에 삶이 통째로 흔들렸죠" 그러나 그들 화교는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며 자신들의 공동체를 다시 만들어왔다는 게 개략적 설명이다.
한반도화교의 참모습 추적 27년의 성과 집대성
출판사 따비는 "1927년과 1931년의 일제강점기 시절 화교를 향한 조선인의 폭력사태, 지금 대한민국의 화교와 한국인은 100년 전과 다른 관계 속에 살고 있는가? 그리고 한반도화교의 진짜 모습을 좇아온 27년의 연구성과의 집대성에서 그 답을 찾아가본다'고 소개했다.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은 내년이면 100년을 맞는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태는 아직 충분히 규명되지 않았다. 화교와 화교 상점 등에 대한 폭행 또는 습격 사건은 전국적인 양상을 띠었지만 특히 인천에서 심했다고 당시 보고서와 연구 자료는 밝히고 있다. 1931년 평양 화교배척사건은 다수의 사상자를 낸 비극이다. 당시 기자는 무서운 유언비어가 돌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고 평양 출신인 소설가 김동인도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화교를 힘들게 한 정책도 여럿 있다. 짜장면 값을 관리대상 품목으로 정해 가격을 통제한 것이나 혼분식 장려 운동으로 볶음밥을 팔 수 없는 지경이었다는 것도 화교들에겐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한국인과의 '동행'의식에 금을 가게 한 요인이기도 했다. 물론 중국과 단교되며 물적 인적 교류가 끊기며 경제적 기반이 무너진 게 가장 큰 요인이었다는 게 이 교수의 진단이다.
알고 대화하고 포용해야 서로 발전한다
"서로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판단하고 대화하고 더 발전적으로 나아갈 것 아닙니까" 대화가 옛 화교와 현재 중국을 넘나들자 이 교수는 이 책의 효용성을 어렵사리 자랑한다. 그 접점에 화교가 있고 그들 오랜 세월 경계에 서있는 화교를 더 알고 나아가 포용하고자 하는 노력의 한 결과가 이 책이라고 했다.
또 처음 듣는 얘기. 화교 200명이 6·25에 참전했다고 한다. 그 중 2명은 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중공군 침공에 맞서 긴급 대응 부대를 편성했고 이들은 한국을 위해 피를 흘리고 목숨을 바쳤다.
이 교수의 학문적 희열은 화교연구라는 분명한 꼭지점에서 폭발할 것이다. 그 꼭지점에 이르는 길에 한국화교라는 번듯한 길을 만들었다. 그 결정판이 '경계를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 교수는 이제 그 길을 더욱 닦고 넓히며 세계로 눈을 돌리고 있다. 먼저 동남아다. '베트남 화인의 역사와 베트남화 과정'(공저)을 올해 펴냈고 앞서 '베트남화교와 한반도화교 마주보기'(공저)를 낸 바 있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화교강국'도 계속 두드려 볼 것이다. 유럽도 도전할 터.
이 교수의 연구 지평은 세계 각지 차이나타운으로 향하고 화교화인의 경제·사회로 넓혀간다. 그들의 삶을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사적 시야에서 탐구할 것이다. '경계'를 아는 사람만이 '경계'를 넘을 줄 안다.
엄정권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tastoday@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