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는 WHO의 재정난 속에 이뤄진 결정으로 미국의 공여금 중단 이후 발생한 예산 공백을 중국이 채우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중국이 미국을 제치고 WHO의 최대 공여국으로 부상하게 된다는 뜻이다.
21일(이하 현지시각)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류궈중 중국 국무원 부총리는 전날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보건총회(WHA) 연설에서 “세계는 현재 일방주의와 힘의 정치가 초래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이는 글로벌 보건안보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이같은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확실한 해법은 다자주의에 있다”고 밝혔다. 그는 “따라서 중국은 앞으로 5년간 WHO에 5억 달러를 추가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WHO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가 주요 재정 지원을 중단한 이후 심각한 예산난에 직면해 있으며 이번 WHA에서는 2026~2027년 예산안을 기존보다 21% 감축한 42억 달러(약 5조7000억원)로 조정하는 결정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WHO는 회원국의 분담금을 향후 2년간 20% 증액하기로 했다. 이같은 조치가 반영될 경우 중국은 사실상 미국을 대신해 WHO의 최대 국가 공여국으로 올라설 전망이다.
WHO 예산은 회원국 분담금과 자발적 기여금으로 구성되는데 그동안 미국은 자발적 기여금을 포함해 WHO의 최대 공여국이었다. 미국은 지난 2020년 기준으로 WHO 전체 예산의 약 15% 이상을 부담했다.
중국 정부의 5억 달러 추가 지원이 분담금 인상분을 포함한 것인지 여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재정난 속에 중국의 대규모 지원 약속은 WHO 내부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 조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WHO 본부가 위치한 스위스 제네바에서 진행된 이날 총회에서 류 부총리는 “보건은 인간 사회의 공동 과제이며 세계는 협력을 통해만 건강한 미래를 보장할 수 있다”며 WHO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는 “WHO는 글로벌 공공재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더욱 강력한 재정 기반이 필요하다”며 중국의 추가 공여 배경을 설명했다.
한편, WHO는 전 세계 공공보건 대응을 주도하는 유엔 산하 기구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 사태 이후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운영의 독립성과 재정 안정성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돼 왔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는 WHO가 코로나19 초기 대응에서 중국 편향적이라는 이유로 지난 2020년부터 단계적으로 지원을 축소했고 그 결과 WHO의 미국 의존도가 줄고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이번 중국의 대규모 지원 발표는 WHO를 둘러싼 미중 간 주도권 경쟁 속에서 이뤄진 결정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국제보건학계에서는 “중국이 다자주의를 내세워 WHO에서 미국의 자리를 대체하려는 전략적 행보”라는 해석과 함께 “WHO의 재정 다변화 필요성과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