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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미국, 관세 앞세워 자국 빅테크 보호…세계 각국과 통상 마찰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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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미국, 관세 앞세워 자국 빅테크 보호…세계 각국과 통상 마찰 심화

디지털세 도입 시도에 '무역협상 중단' 초강수…캐나다, 결국 백기
기업은 '미국 우선주의'로 설득…자동차·철강업계는 '보복관세' 유탄 우려
미국의 빅테크 보호 무역주의가 전 세계 통상 질서를 흔들고 있다. 디지털세 도입을 추진하던 국가들은 미국의 관세 위협에 신음하며 선택의 기로에 섰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미국의 빅테크 보호 무역주의가 전 세계 통상 질서를 흔들고 있다. 디지털세 도입을 추진하던 국가들은 미국의 관세 위협에 신음하며 선택의 기로에 섰다. 사진=로이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국제 무역 분쟁을 미국 거대 기술 기업(빅테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핵심 지렛대로 활용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22일(현지시각) 보도했다. 관세 위협과 미국 시장 접근성을 무기로 각국의 디지털세 도입을 막고, 자국 인터넷 기업의 해외 지배력을 다지려는 전략이다. '미국 우선주의' 기조를 통상 분야에 적용해 해외에서 자국 빅테크가 차별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빅테크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미국 우선주의'와 동일시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지원을 얻어냈다는 분석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수십 개 교역 상대국에 대한 고율 관세 발효 시한으로 자체 설정한 8월 1일을 앞두고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브라질, 한국, 유럽연합(EU) 등과의 무역 협상에서 미국의 거대 인터넷 기업을 겨냥한 규제와 과세 조치는 핵심 걸림돌이다. 재무부 스콧 베선트 장관과 미국 무역대표부(USTR)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는 오는 25일 워싱턴에서 한국 측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한다.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 노선은 지난달 캐나다와의 무역 협상 중단 사례에서 뚜렷하게 드러났다. 캐나다가 3%의 디지털 서비스세 도입을 추진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협상 테이블을 엎었고, 캐나다는 세금 계획을 신속히 철회한 뒤에야 대화 테이블에 다시 앉을 수 있었다. 이처럼 미국은 자국 IT기업에 불리한 디지털세가 논의될 때마다 보복 관세 가능성을 경고하며 양자 협상을 압박한다.

◇ '미국 우선주의' 업은 빅테크, 트럼프 행정부와 '찰떡 공조'


이러한 기조의 배경에는 수년간에 걸친 테크 기업들의 설득이 있었다. 이들은 해외의 불공정 세금과 규제가 미국 내 투자 여력을 위축시킨다고 주장해왔다. 국내에서는 반독점 소송과 관세 문제로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한편, 해외 디지털세 문제에서는 완벽한 승리를 거둔 셈이다. "기업들은 빅테크의 의제를 '미국 우선주의'로 포장하는 데 매우 성공했다"는 것이 과거 메타와 구글 등에서 일했던 누 웩슬러 홍보 컨설턴트의 평가다.

상무부 하워드 러트닉 장관, 재무부 스콧 베선트 장관, USTR 제이미슨 그리어 대표는 행정부 내에서 테크 업계의 든든한 우군이다. 미국은 이들의 지원에 힘입어 인도네시아와의 협상에서 영화, 소프트웨어 등 전자 상품에 대한 관세 계획을 철회시켰고, 베트남으로부터도 비슷한 약속을 확보했다. 쿠시데사이 백악관 대변인은 "해외의 불공정 관행으로부터 혁신적인 미국 기업을 지키겠다는 대통령의 공약을 이행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고 행정부의 방침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러한 태도는 1기 행정부 때부터 일관성을 보였다. 그는 각국의 디지털세를 "미국 기술기업의 이익을 부당하게 빼앗는 행위"로 여기며, 미국 주도의 국제 디지털 질서를 우선시하고 있다. 에버렛 아이젠스탯 전 국가경제위원회(NEC) 부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다른 나라들이 미국 기업으로부터 부당하게 수익을 빼앗는 행위로 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트럼프는 1기 재임 중 EU가 구글 등에 거액의 과징금을 물리자 당시 EU 경쟁 정책 수장을 '미국을 증오하는 세금 여사(tax lady)'라 비난하기도 했다.

세계 각국은 디지털 광고와 온라인 활동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는 실리콘밸리 기업의 수익을 자국으로 돌리기 위해 애써왔다. 허위 정보 확산 방지, 안보와 청소년 보호 등을 이유로 규제를 강화하고 반독점법을 손보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유럽연합의 디지털시장법(DMA) 등 IT 기업을 겨냥한 비관세 장벽 또한 미 무역대표부(USTR)의 조사 대상에 올랐다. 바이든 행정부는 다자간 협의체로 이 문제를 풀려 했으나 성과를 내지 못했고, 이는 테크 업계의 불만으로 이어졌다.

컴퓨터 통신 산업 협회(CCIA) 맷 슈루어스 최고경영자(CEO)는 "미국 정부가 마침내 우리가 꺼야 할 불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환영의 뜻을 내비쳤다.

◇ '빅테크만 편드는 정책' 비판…다른 산업 피해 우려도


반면 이러한 정책을 두고 '미국 빅테크만 편드는 정책'이라는 비판도 거세다. 민주당과 일부 노동계를 중심으로 이미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빅테크를 과도하게 보호하는 반면, 이로 인한 무역 갈등 심화로 자동차, 철강 등 다른 산업이 보복관세의 표적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트럼프의 재선 성공 후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최고경영자, 구글의 순다르 피차이 최고경영자 등 테크 거물들은 플로리다의 마러라고 클럽으로 트럼프를 찾아 직접 의견을 전달하고 적극적인 로비와 정치자금 후원을 이어왔다. 이 자리에서는 해로운 해외 규제 문제가 꾸준히 논의됐다고 한다.

행정부의 전방위 압박은 실질적인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3월 인도가 디지털 서비스세를 철회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인도와의 무역 협상이 타결에 근접했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브라질이 새로운 표적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동맹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에 대한 브라질 사법 당국의 조치를 문제 삼아 브라질산 제품에 50% 관세를 위협했고, 직후 USTR은 브라질의 디지털 무역과 전자 결제 관행에 대한 불공정 무역 조사를 시작했다. 이 조치에 테크 업계는 즉각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CCIA의 슈루어스는 "이 문제는 현재 매우 첨예한 관심사"라고 강조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내외 정치적 부담을 안으면서까지 미국 빅테크의 해외 이익 보호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다. 관세와 연계한 디지털세 폐지 요구, 각종 현지 IT 규제에 대한 강경 대응 등은 디지털 무역의 국제 질서를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시도다. 다만 이러한 독단적인 정책은 파트너국과의 통상 마찰 심화, 디지털 규제의 국제 공조 실패, 다른 산업의 피해 등 복합적인 위험이 따른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