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미국처럼 에어컨 의무화" vs 정부 "거리만 더 뜨거워져"…냉방 갈등 유럽 휩쓸어

월스트리트저널은 지난 22일(현지시각) 유럽 각국에서 우파 정치인들이 에어컨 확대를 주장하는 반면, 환경운동가들은 기후변화 악화를 우려하며 반대한다고 보도했다.
6월과 7월 서유럽을 휩쓴 폭염으로 1000개가 넘는 프랑스 학교가 에어컨 부족으로 일부 또는 모두 문을 닫았다. 이 지역 가전제품 매장에는 에어컨 대란이 일어났다. 유럽 코페르니쿠스 기후변화국에 따르면 지난달은 서유럽에서 역대 가장 더운 6월이었다. 7월 초 파리 온도계는 섭씨 44도까지 올랐다.
◇ 극우 정치인들, 에어컨 확대 공세
프랑스 극우 국민연합당 대표 마린 르펜은 학교, 병원과 다른 시설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대규모 움직임을 제안했다. 르펜은 "전 세계 수십 개국과 달리 냉방 부족으로 공공 서비스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며 "정부는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비판했다.
영국에서는 보수당이 런던 노동당 시장에게 새 주택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방식을 제한하는 규정을 없앨 것을 요구했다. 스페인에서는 극우 정당 복스가 에어컨 고장 사례를 들며 기성 정당들을 비판해 왔다.
프랑스 보수파는 이번 달 전국 기관에 에어컨 설치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내놓으며 "미국은 학교 에어컨 현대화에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고 있고, 미국 병원은 이미 대부분 에어컨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 정부·환경 운동가들 "기후변화 악화" 반박
프랑스 정부는 곧바로 반발했다. 아녜스 파니에-루나셰 에너지부 장관은 에어컨을 대량으로 설치하면 기계에서 나오는 뜨거운 공기로 거리가 더워져 폭염을 악화시킬 것이라며 "이것은 틀린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그는 "취약한 사람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려면 에어컨을 설치해야 하지만, 모든 곳에 설치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런던 사디크 칸 시장 대변인은 “시장이 에어컨 설치를 아예 막는 것은 아니다”며 "개발 계획에서는 개발업체가 새 주택에 다른 형태의 바람 통하는 장치를 설치하도록 권한다. 이는 가구의 에너지 비용을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설명했다.
보수당 소속 앤드류 보위 의원은 칸 시장에게 "런던 새 건물에 적용하는 말도 안 되는 에어컨 제한"을 없앨 것을 요구하며 "우리는 에너지 사용을 줄인다며 이런 빈약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언론들은 미국식 에어컨 도입 우려도 제기했다. 실내 온도를 실외 온도보다 섭씨 15도 이상 낮추면 메스꺼움, 의식 상실, 심지어 숨이 멎을 수 있는 '열충격'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어떤 사람들은 에어컨이 설치된 방에서 오래 지낼 경우 생길 수 있는 호흡기 감염을 걱정한다.
남유럽에서는 에어컨 때문에 1년 전력 사용량이 크게 늘 것으로 예상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는 2050년까지 약 10% 늘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북유럽에서는 겨울 난방 수요가 줄어 여름 추가 에너지 수요를 일부 상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부가 천연가스 난방을 냉난방에 모두 쓸 수 있는 전기 히트 펌프로 바꾸려는 계획 때문에 전력망에 새로운 부담이 더해질 것으로 보인다.
일부 환경운동가와 과학자들은 유럽이 에어컨 대량 설치에 의존하지 않고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건물과 거리에 녹색 공간을 늘리면 도시의 심한 더위를 낮출 수 있고, 바람이 통하도록 건물을 설계하고 햇빛이 건물로 들어오지 않도록 셔터를 달면 에어컨 필요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 관리들은 기존 냉방 시스템 필요를 없애려고 지열 냉난방 시스템을 늘리고자 한다. 이런 시스템은 땅 깊은 곳에서 물을 돌려서 여름에는 건물 열을 땅속으로 빼내고 겨울에는 다시 되돌려 보낸다. 이 과정은 일반 냉방보다 훨씬 효과적이고 열을 대기로 내보내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투자 비용이 상당하며, 유럽 구세계 수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00년 이상 된 건물에 설치하기에는 비용이 많이 들 수 있다.
보르도 근처 와이너리인 샤토 퐁테카네는 지난 폭염에도 완전히 작동해 와인 저장고와 사무실을 식혀주는 시스템을 설치했다고 기술 담당자 마티유 베소네가 밝혔다. 베소네는 "생태계 문제는 에어컨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라며 "와인은 우리 일이고, 식초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에어컨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세계기상기구에 따르면 유럽은 1980년대 이후 세계 평균보다 두 배나 더 많은 기온을 기록하며 가장 빠르게 더워지는 대륙이다. 10년째 파리에 사는 한 시민은 "해마다 점점 더 더워지는 것 같다"며 "지금은 너무 더워서 올해 고장이 나서 파리 중심부 한 가전제품 매장에서 마지막 남은 에어컨을 샀다"고 말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