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스위스산 수입품에 대해 39%의 고율 관세 부과를 발표한 뒤 스위스가 전방위적인 후폭풍에 휘말렸다.
정부는 협상 실패 책임을 두고 정치권과 산업계가 충돌하는가 하면 제약업계 책임론까지 부상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스위스 대통령 간 통화가 ‘참사급’이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스위스 경제는 수출·투자·환율 전방위 압박에 직면하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와 로이터통신이 3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 “10%는 부족하다”…트럼프, 통화 첫마디부터 강경
트럼프는 첫마디부터 “10%는 부족하다”며 스위스가 미국의 돈을 훔쳐가고 있다는 식의 주장을 펼쳤고 무역적자 390억 달러(약 54조2000억 원)를 문제삼았다.
스위스는 지난달 4일 연방정부 차원에서 10% 관세 수용 입장을 확정한 상태였다.
스위스 정부 고위 관계자는 로이터와 인터뷰에서 “트럼프는 애초에 완전히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다”며 “협상이라는 게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FT는 “스위스 정부는 사실상 서명만 남은 상태라고 믿었지만 미국 측은 그런 합의는 없었다고 부인했다”고 전했다.
◇ 스위스 언론 “1515년 이후 최악의 패배”…제약업계 비난도
협상 실패 이후 켈러-주터 대통령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고 있다.
스위스 유력 일간 존탁스차이퉁은 “이번 사태는 켈러-주터 대통령의 최대 실패”라고 평가했고, 대중지 블릭은 “스위스가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 프랑스에 패한 이후 최대 굴욕”이라고 전했다.
비판은 제약업계로까지 확산됐다. 조르주 케른 브라이틀링 최고경영자(CEO)는 “제약업계가 트럼프를 자극해 스위스 전체가 인질이 됐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달 31일 글로벌 제약사에 약값 인하를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했으며 이와 별도로 특정 국가의 제약 제품에 대한 추가 관세도 검토 중이다. 스위스 제약업계는 전체 수출의 약 6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어 충격은 불가피하다.
◇ 정부, 직접 방미 카드까지 검토…금 제외한 수출품 가격 급등
스위스 정부는 트럼프가 언급한 무역적자 대부분이 금 수출(정련 후 재수출)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스위스중앙은행에 따르면 금괴는 수출액의 3분의 2를 차지하지만 이번 관세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가이 파르믈랭 경제부 장관은 스위스 방송 RTS에 출연해 “트럼프의 결정 이유를 파악한 뒤 선의의 자세로 제안 수정에 나설 수 있다”고 밝혔고 켈러-주터 대통령과 함께 직접 방미할 가능성도 열어뒀다. 파르믈랭 장관은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를 더 수입하거나 미국 내 투자를 확대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 측은 스위스의 투자 약속조차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스위스는 미국에 엄청난 양의 의약품을 수출하고 있고 우리는 자국에서 직접 생산하길 원한다”며 제약산업을 겨냥한 불만을 드러냈다.
◇ 스위스 경제 ‘직격탄’…수출·증시·기준금리 줄줄이 충격
고율 관세는 스위스 경제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스위스연방공과대학(ETH)의 한스 게르스바흐 교수는 “GDP가 최소 0.3~0.6% 감소할 수 있으며 제약품까지 포함될 경우 1% 이상 감소해 경기침체 가능성도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계 투자은행 노무라는 “디플레이션 압력에 대응해 스위스국립은행(SNB)이 9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해 -0.25%로 조정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스위스 기계공업협회는 “31% 관세도 기업의 25%만이 미국 고객에게 비용을 전가할 수 있다고 답했으며 39%는 전례 없는 수준”이라고 밝혔다.
바클레이즈에 따르면 일부 스위스 기업은 관세 발효 전에 대미 수출을 앞당겨 3~5월 시계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140% 이상 급증했다. 그러나 ‘와치스 오브 스위스’의 주가는 1일 7% 넘게 급락하며 수년 내 최저치를 기록했다.
무역 전문가 슈테판 레게 세인트갈렌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항상 중심에 있고 싶어하고 모두를 긴장시켜 협상 주도권을 쥐는 것을 즐긴다”며 “그 누구와 접촉하더라도 트럼프 본인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진단했다.
김현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roc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