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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기업 핫라인, CEO 운명 가르는 '조용한 권력' 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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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기업 핫라인, CEO 운명 가르는 '조용한 권력' 부상

네슬레 CEO, 익명 제보 한 통에 해임…180억 달러 규모로 성장한 '진실의 창구'
조직문화 진단부터 위험 관리까지…워런 버핏도 신뢰하는 '내부 감시 시스템'
성추문부터 회계 부정까지, 기업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익명 제보 창구 '핫라인'이 기업의 윤리 경영과 위기관리 능력을 평가하는 바로미터로 자리 잡고 있다. 사진=오픈AI의 챗GPT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성추문부터 회계 부정까지, 기업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익명 제보 창구 '핫라인'이 기업의 윤리 경영과 위기관리 능력을 평가하는 바로미터로 자리 잡고 있다. 사진=오픈AI의 챗GPT가 생성한 이미지.
성추문부터 회계 부정까지, 기업 내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익명 제보 창구 '핫라인'이 조직의 운명을 뒤흔드는 핵심 변수로 떠올랐다. 최근 세계 최대 식품 기업 네슬레의 최고경영자(CEO)가 핫라인에 접수된 제보 하나로 축출된 것은 그 막강한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제 핫라인은 단순한 소통 창구를 넘어, 기업의 윤리 경영과 위기관리 능력을 평가하는 바로미터로 자리 잡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보도했다.

기업 핫라인은 직원들이 직장 내 비윤리적 행위나 부정, 괴롭힘 등을 익명으로 제보할 수 있도록 마련한 소통 창구다. 입 냄새 같은 사소한 불만부터 뇌물 수수와 같은 중대 범죄까지, 직원들이 안전하게 경고 신호를 보낼 수 있을 때 회사가 더 투명하게 운영된다는 전제 위에 180억 달러(약 25조 원) 규모의 거대 산업이 성장했다. 시카고에 있는 기업 자문사 '그룹 360 컨설팅'의 라힐라 안와르 CEO는 "핫라인은 마법과 같다"며 "사람들이 기꺼이 진실을 말하기 때문"이라고 그 가치를 설명했다.

법적 의무화가 핫라인 확산을 이끌었다. 2002년 미국에서 엔론의 회계 부정 스캔들 이후 제정한 '사베인스-옥슬리법'은 상장 기업의 내부 고발 시스템을 의무화했다. 2019년 유럽연합(EU) 역시 유사한 지침을 도입했다. 이에 따라 직원 1000명 이상을 둔 대기업의 90% 이상이 핫라인을 운영한다. 내부 조사 추적 솔루션 기업 HR 어큐이티의 데브 멀러 CEO는 "상황이 심각해졌을 때만이 아니라, 평소에도 직원들이 목소리를 내도록 장려해야 한다"며 핫라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엔론 사태·미투 운동 거치며 180억 달러 산업으로


핫라인 산업이 커지면서 스피크업, 나벡스, EQS 등 전문성을 갖춘 제3자 위탁 운영 업체들도 등장했다. 네슬레의 핫라인을 운영하는 스피크업은 지난해 네슬레와 공급업체에서 따돌림, 사기, 이해 상충 등과 관련해 3218건의 제보를 처리했다. 네슬레는 이 중 20%를 사실로 확인했고, 그 결과 직원 119명이 회사를 떠났다고 밝혔다. 기존에 상사나 인사팀을 통해 문제를 처리하던 방식과 달리, 핫라인은 익명성과 신속성, 그리고 필요할 때 외부 감사가 가능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기업 핫라인의 역사는 1980년대 미국 정부의 예산 낭비를 감시하던 채널에서 시작했다. 당시 미 국방부가 659달러짜리 재떨이와 435달러짜리 망치를 구매한 사실이 알려지자, 이를 막기 위한 내부 고발 제도가 떠올랐다. 핫라인 업계의 선두 주자인 나벡스의 전신 에식스포인트를 설립한 데이비드 칠더스는 "초창기 핫라인은 말 그대로 책상 위나 작은 벽장에 놓인 '붉은 전화기'였다"고 회상했다.

1990년대 들어 전직 FBI 요원이었던 리처드 쿠서로가 '내셔널 핫라인 서비스'와 같은 제3자 위탁 운영 회사를 세우면서 산업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24시간 운영하는 상담팀이 등장했고, 2002년 사베인스-옥슬리법 통과로 시장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2018년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MeToo)' 운동은 성희롱·성폭력 고발 창구로서 핫라인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고, 미국프로농구(NBA) 리그가 30개 구단 전체를 위한 핫라인을 개설하는 등 도입에 속도가 붙었다.

CEO 불륜부터 회계 부정까지…조직 명운 가른 제보들


오늘날 제보는 전화보다 온라인 포털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으며, 약 4분의 1이 익명으로 접수된다. 접수한 내용은 사안에 따라 인사(HR) 부서나 법무팀으로 전달하고, 직원 관계팀이 주도해 내부 조사를 진행한다.

조사는 치밀하다. 예를 들어 관리자와 부하 직원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제보가 들어오면, 조사팀은 당사자들을 직접 대면하기보다 먼저 이메일, 사내 메신저, 회의 일정 등을 확보해 '저녁 식사', '데이트' 같은 단어를 검색하며 관계의 증거를 찾는다. 직원 관계 수석 이사 르샨다 데이비스는 "모든 조치는 사실에 근거해야 한다"며 철저한 증거 수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네슬레의 로랑 프렉스 전 CEO 사건 역시 올해 봄, 사내 '스피크업(Speak Up)' 핫라인에 들어온 익명 제보가 발단이었다. 직속 부하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제보가 들어오자 이사회는 외부 법무법인에 조사를 의뢰했고, 조사 결과 관계가 사실로 드러나자 프렉스는 지난 9월 1일 자로 해임됐다. 그는 퇴직금 없이 회사를 떠나야 했으며, 후임으로는 네스프레소 사업부 수장을 임명했다. 크레디트 스위스의 한 임원이 2021년 여성에 대한 부당 대우 혐의로 물러나고, 화학기업 케무어스의 최고 경영진이 회계 부정으로 사임한 것 역시 모두 익명의 핫라인 제보에서 비롯한 사례다. 멀러 CEO는 "CEO 등 고위직에 대한 신고가 있을 때는 대외적으로 큰 충격을 주며, 기업이 외부 로펌 등 객관적인 기관을 통해 조사하는 것이 관행"이라고 조언했다.

단순 불만 창구 넘어…조직 건전성 '바로미터'로 진화


핫라인에 들어오는 내용은 심각한 비리뿐만이 아니다. 동료 간의 갈등, 상사의 과도한 업무 지시, 불합리한 인사 평가, 무례한 농담 등 다양한 불만이 쏟아진다. 대부분의 신고는 이처럼 비위가 아닌 일상적인 문제들이지만, 소수의 심각한 사안이 높은 파급력을 갖는다.

사소해 보이는 불만들이 모여 중요한 패턴을 드러내기도 한다. 핫라인은 특정 부서나 관리자에게서 반복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조기 경보 시스템' 역할을 한다. 신고가 누적돼 특정 문화나 부서의 문제점으로 드러나면, 기업은 조직문화 개선, 인사 조치, 법적 제재에 나서기 때문에 경영 위험 관리에 결정적 구실을 한다. 전 메타 임원이자 스탠퍼드 경영대학원 교수인 제니퍼 둘스키는 "여러 불만에서 패턴이 나타날 때 기업은 반드시 조치를 해야 한다"며 "신고를 무시하거나 형식적으로 처리하면 시스템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내부 문화의 독성을 악화시키는 부작용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역시 핫라인의 열렬한 지지자다. 그가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는 해마다 약 4000건의 제보를 핫라인으로 받는다. 버핏은 2017년 주주총회에서 "자회사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일에 대한 나의 주된 정보원은 핫라인"이라며 내부감사팀과 전문조사팀이 심각한 사안을 선별해 조사한다고 밝혔다. 그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좋은 시스템"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기업 핫라인은 이제 단순한 고충 처리 창구를 넘어, 조직의 건강성을 진단하고 경영 투명성을 높이며 위기를 사전에 막는 핵심 경영 도구로 진화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